트란실바니아의 고요를 찾아서
글 : 브렛 마틴 사진 : 제마 미랄다
루마니아 시골의 한 공동체가 전통 방식을 보존해 목가적인 삶을 지켜낼 뿐 아니라 더욱 풍성한 삶에 대한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느 쌀쌀한 저녁,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13세기 교회의 목사관에 세 명의 남자가 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있다. 바깥에는 오리들과 벌집이 있고 흰 털북숭이 개 한 마리가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뭔가를 향해 짖어대고 있다. 세 남자는 땔나무 난로에 몸을 녹이면서 차를 홀짝이며 자신들의 고향인 커라초니펄버에 대해 이야기한다.트란실바니아만큼 유명하면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 또 있을까? 팀북투 정도라면 모를까. 유럽 전역이 지금보다 더 야생 상태에 가깝던 시절에도 트란실바니아는 가장 원시적인 변방으로 손꼽혔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트란실바니아에 발을 들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드라큘라>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트란실바니아에서는 색슨족과 훈족, 튀르크족, 타르타르족, 그 외에 덜 알려진 여남은 부족이 마치 바로 지난주에 그곳을 지나갔나 싶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곳 숲은 여전히 곰 천지다. 매력적인 장소가 많은 유럽조차 때때로 너무 문명화된 곳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에 호모로드강 계곡에 자리한 이 마을처럼 때묻지 않은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 훨씬 짜릿하게 느껴진다.
이 루마니아 중부의 시골 지역에 사는 주민 약 85%가 그렇듯 목사관 탁자에 모여 앉은 남자들은 헝가리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적어도 1000년간 이곳에 살아온 헝가리계 민족 ‘세케이’다.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짧은 잿빛 수염과 밝고 장난기 어린 눈을 가진 오르반 처버(70)다. 그는 현대 문명이 압박해 들어오는 와중에도 선견지명을 이용해 이 오지를 보존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오르반은 이 마을의 운영 기구인 ‘쾨즈비르토코샤그’의 지도자로 그 활동을 수행한다. 마을을 이토록 독특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은 유서 깊은 토지 공동 소유 및 관리 방식이다. 쾨즈비르토코샤그는 347명의 ‘주주’에게 이용권과 자원, 소득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물과 숲, 목초지를 관리한다. 이 방식은 오래됐지만 놀라울 정도로 견고하며 이곳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고 오르반은 말한다. “가령 겨울이 오면 모두가 땔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덧붙인다.
이런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르반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증거다. 루마니아가 공산 정권 치하에 있던 수십 년 동안에는 쾨즈비르토코샤그가 해체됐다. 실제로 악명 높은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커라초니펄버 같은 마을과 그곳의 생활 방식을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했고 공산 정권도 무너졌다. 커라초니펄버는 2000년에 1100ha가량의 땅에 대한 관할권을 되찾았다. 쾨즈비르토코샤그가 부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복잡한 토지 소유권 계승 방식에 관한 상세한 기록물들이었다. 오르반이 가죽 가방을 열더니 두툼한 문서철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페이지마다 두 단으로 이름과 숫자들이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커라초니펄버의 쾨즈비르토코샤그 구성원들에 대한 1936년도 기록이었다. 집집마다 숨겨져 있거나 기록 보관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이 기록물들은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후 오르반과 다른 쾨즈비르토코샤그의 지도자들이 마을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줬다. 오르반은 관청에 보관돼 있던 산더미 같은 문서들을 샅샅이 뒤진 끝에 이 명단을 발견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극적인 순간이었죠. 우리 것을 되찾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거든요.” 그는 말한다. 탁자에는 센트팔리 게저(75)도 앉아 있다. 그는 유니테리언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더 젊은 남자는 목사 베네데크 미하이다. 오르반은 1946년에 작성된 두 번째 명단을 펼치고는 165행을 가리킨다. 센트팔리의 할아버지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탁자를 둘러보니 세 사람 모두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오르반 처버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이지만 괴짜로도 통한다. 다른 쾨즈비르토코샤그의 지도자들은 비싼 차를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존재감을 드러내곤 하는 반면 오르반은 낡아 빠진 해치백 차량을 몰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그가 2019년에 주민들의 회합 장소로 쓰기 위해 개조한 전통식 노천탕도 그런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 노천탕은 약초 재배장과 차를 끓일 수 있는 화덕까지 갖추고 있다. 마을 건너편의 숲 그늘에는 그가 매년 밤 축제를 여는 밤나무 밭이 있다. 그리고 쾨즈비르토코샤그 마을 회관도 있다. 내가 마을에 머물고 있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주민들이 전통 의상을 갖춰 입고 회관에 모여 ‘아동 결혼식’ 연극 무대를 펼쳤다.
이 모든 프로젝트는 마을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생태 관광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놓는 시도라고 오르반은 말한다. 그는 세케이의 태양과 달이 유럽연합 깃발의 둥글게 늘어선 별들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묘사한 상징으로 이런 세심한 균형 잡기를 설명하곤 한다.
무엇보다도 쾨즈비르토코샤그는 이 마을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숲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이곳 숲은 중요한 연료 공급원이면서 취약한 생물다양성의 토대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사냥꾼이자 재주 많은 땜장이인 외치 마차시를 따라 숲에 갔다. 그가 야생동물 관찰용으로 쓰는 세 개의 동작 인식 카메라를 매일 확인하러 가는 길에 나를 불러준 것이다. 우리는 그가 오래된 랜드로버를 개조해 만든 전 지형 만능차를 타고 바큇자국이 깊게 팬 산길을 덜커덩거리며 달린 뒤 조용히 걸어서 이동했다. 외치가 기르던 ‘부키’라는 이름의 통통한 여우가 뒤따라왔다. 명금류를 제외하면 부키는 우리가 본 유일한 동물이었다. 하지만 외치의 집으로 돌아온 후 난로 위에서 장화를 말리는 동안 그가 카메라에서 빼내온 사진들을 살펴보니 사슴과 멧돼지, 온갖 작은 포유동물 그리고 수많은 곰이 찍혀 있었다. 숲을 지나는 동안 이런 녀석들이 주변에 숨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오싹했다.

물론 이런 원칙들이 영락없이 공산주의와 비슷하다는 점은 모순적이다. “혐오하는 용어지만 사실이에요. 우리는 1000년간 이 방식으로 살아왔어요. 굳이 공산당이 우리를 찾아와서 알려줄 필요가 없었죠.” 세케이는 인정한다.
나는 세케이의 집을 방문했다. 돼지를 잡아 남은 한 해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연례 행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도착해보니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는 돼지의 몸뚱이가 야외 탁자에 놓여 있었다. 퉁퉁한 얼굴의 정육사가 능숙한 솜씨로 돼지를 해체했다. 알짜 부위들은 소금물에 절였다가 나중에 훈연하며 내장을 비롯한 부속들은 부엌에 임시로 설치한 소시지 작업장으로 향한다. 남는 소시지는 이웃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이웃들 역시 때가 오면 잉여물을 나눌 것이다.
세케이의 남편이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졸트-처버가 ‘펄린커’를 나눠줬다. 자두로 직접 담근 브랜디였다. “우리는 돼지 잡기의 의미를 아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직접 키운 것을 먹는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며 우리가 한데 이어져 있다는 뜻이죠.” 그는 말했다.
이 지역의 많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세케이의 집 벽에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표시된 지도가 걸려 있다. 이곳 사람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듯 이 지도는 역사의 물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일깨워준다. 겨울은 갈수록 따뜻해지고 있다. 지난 두 번의 여름에는 가뭄이 이어졌다. 루마니아에서 새로운 민족주의가 일어나면서 소수 민족에게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 호모로드 계곡의 마을들에서는 아이와 노인들을 볼 수 있지만 그 중간 세대를 찾아보기 힘들다. 청장년층이 일자리나 고등 학위 또는 그저 농사보다 편한 삶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세케이 졸트-처버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한 곳에서 일할 사람을 찾을 수 없어 네팔 사람을 고용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르반 처버와 쾨즈비르토코샤그가 하는 일은 소속 공동체를 가꾸는 법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이는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 작은 지역에 내려진 축복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목사관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오르반은 문서들을 그러모은 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그는 애정 어린 손길로 가방을 토닥이고는 옆구리에 꼈다. “앞으로 누가 이 문서들을 챙길지 알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