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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글 : 알렉산드라 풀러 사진 : 로빈 해먼드

억압, 공포, 그리고 용기, 침묵을 깨고 일어나는 짐바브웨인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짐바브웨인들에 대해 알아야 할 사실이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들이 땅에 지나친 애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놀랍지 않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의 다홍빛 무사사삼림지대를 봤거나 어느 여름날 오후 초원 저지대에 부는 금방이라도 불길이 일 것 같은 뜨거운 바람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곳이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땅에 대한 애착이 큰 만큼 거기에 따르는 대가도 크다. 이 아름다운 땅에 전쟁과 혁명이 일어나면 전쟁의 패배자나 정치적으로 불운한자들은 땅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그들은 너무나 큰 상실감에 사로잡혀 결국에는 잃어버린 땅을 찾아 헤매는 유령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짐바브웨는 비록 작지만 많은 이야기꾼과 음악인들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짐바브웨의 밴드 ‘분두 보이스’는 1987년 영국 런던의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미국의 대중가수 마돈나의 콘서트에서 개막 공연을 했다. ‘짐바브웨의 사자’라는 별명을 지닌 토머스 맙퓨모는 봉기를 뜻하는 ‘치무렌가’라는 저항 음악 장르를 창시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케인 상’은 두 번이나 짐바브웨 작가들에게 돌아갔다. 짐바브웨에서 성장기를 보낸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지금은 짐바브웨인이 아니지만 영국 태생인 내 부모는 1970년대에 몇 년 동안 당시 불량국가였던 로디지아의 동쪽 끝자락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의 옛 명칭이다.아버지는 징집된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자원 경찰이었는데 두 사람은 로디지아의 백인 통치를 유지하고 공산화를 막기 위해 싸웠다. 1965년, 로디지아의 총리였던 이안 스미스는 “더 백인 주도적이고, 더 밝은 로디지아”라는 표어를 내걸고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후로 15년 동안 소수인 백인은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에 대한 통치권을 놓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1960년대 초에 20만 명이 조금 넘었던 백인 인구는 1980년에는 약 15만 명으로 감소했고 같은 기간에 흑인의 인구는 350만 명에서 7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979년 말, 흑인들을 해방시키려는 해방군이 이웃 모잠비크와 잠비아에서 물밀듯이 몰려왔다. 이들은 짐바브웨 군이 다 해치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들이닥쳤다. 그리고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 그 다음 해 2월에 총선이 열렸고 ‘짐바브웨아프리카국민연합애 국전선(ZANU-PF)’이 승리해 ZANU-PF의 당수 로버트 가브리엘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초대 총리로 당선됐다. 무가베는 용서와화해의 분위기를 내비쳤지만 내 어머니는 이를 믿지 않았고 북쪽에 있는 말라위로 이주했다.


무가베는 과거 백인 소수 정부가 조성해놓은 민족적·인종적·정치적 분열을 악용해 짐바브웨의 국내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자신의 절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짐바브웨에는 다수 민족인 쇼나 족과 소수 민족인 은데벨레 족, 이렇게 2개의 주요 민족이 있는데 무가베는 쇼나 족 출신이다. 1983년에 무가베는 은데벨레 족의 정치적 반발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북한에서 훈련받은 ‘제5여단’을 짐바브웨 서부 지역에 배치했다. 그 후 5년 동안 약 2만 명의 은데벨레 족이 학살 당했다. “그는 우리의 약점을 아주 잘 파악하고 이용했습니다.”무가베와 함께 싸웠던 전 ZANU-PF 해방군 지휘관 윌프레드 음한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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