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힐리 연안을 찾아가다.
독특한 이슬람 유산, 동아프리카의 항구에 자리잡고 몇 세기동안 아라비아와 인도 상인들의 교역중심지 역할을 하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잔지바르, 다르에스살람, 코모로, 몸바사, 모가디슈, 봄베이, 망갈로를..." 늙은 어부는 인도양 연안의 항구 도시 이름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나는 이 도시들은 물론이고 다른 데도 많이 가봤다오. 여기 아프리카에서는 상아, 맹그로브, 코코넛, 거북, 별보배조개 껍데기를 실어가고, 아라비아에서는 대추야자와 고래기름, 카펫, 향료를 들여왔지. 인도에서는 단지나 유리제품, 옷감을 가죠오고 말이야. 교역은 곧 우리의 생활이었어."바와나 샤피 아메드와 나는 케냐의 라무에서 옛 성채의 베란다에 앉아있다. 여기서는 아치형 대문을 통해 저 멀리 항구가 보이는데 바다에는 삼각돛을 단 다우선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사람과 물건을 실은 배들이 드나드는 이곳 라무는 케냐의 최북단 군도에 속하는 섬으로 길이 13km, 폭 5km에 불과하다. 아래쪽으로 보이는 시내 광장에서는 남자들이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대부분 '코피아' 모자에 '칸주(긴 웃옷)' 차림이다. 물건을 짊어진 당나귀들과 손수레를 끄는 소년들이 급히 지나간다. 골목으로 사라지는 아낙들도 보였는데 그 중에는 눈만 내놓은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부이부이'를 입은 여자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당나귀 울음소리, 발굽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근처 이슬람 사원에서는 오후 기도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진다. 나이가 "예순 다섯살쯤 된다"는 아메드에게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열 다섯 살에 바다로 진출하려고 라무를 떠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라무도 번창했지." 그의 말이다. "바람이 돛을 부풀리면 부자가 됐어. 우리 조상 때처럼 말이야. 계절풍이 불면 수많은 다우선들이 외지에서 들어왔는데 30여m 되는 활대에 달린 새하얀 돛들이 창공을 가르는 모습이란! 밤도 멋졌지. 크고 작은 다우선 수백 척이 항구에 정박했는데 음식을 만드느라 피워놓은 모닥불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으니까."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바다 생활은 무척이나 고달팠다네. 20m짜리 배에 15명이 끼여 타고는 여기서 인도까지 한 달을 갔으니 말이야. 심한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살아남을 희망조차 송두리째 사라졌지. 상어떼가 들이받는 바람에 배가 전복될 뻔한 적도 있고, 하지만 세상이 워낙 넓으니까. 뱃사람들만의 즐거움이란 게 있지 않소. 남들사는 구경도 하고, 외국 친구들도 사귀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나중에 더 얘기하자"며 사원으로 향했다.
한창 때 라무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지금의 모잠비크까지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형성돼 있던 항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인도양을 오가며 행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 항구도시들은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2000여 년 동안 아메드와 같은 뱃사람들은 계절풍을 타고 이들 항구를 드나들었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아라비아 선원들 앞에는 훌륭한 항구들, 물고기가 풍부한 바다, 비옥한 땅, 그리고 교역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여자들과 결혼하려고 머무르는 아라비아 선원들도 많았는데, 여기 사람들의 생김새를 보면 혼혈의 흔적이 뚜렀하다. 아프리카, 아라비아 양쪽의 언어와 관습이 섞이면서 도시적이고 상업적인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런 특성은 동아프리카 연안 특유의 것으로 라무도 예외가 아니다. '스와힐리'라는 이름도 해안이라는 뜻의 아랍어 '사와힐'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