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멀고도 험난한 재건의 길
왜 아프간에서는 같은 무슬림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미국을 사악한 존재로 여길까? 미국의 아프간 공습 직전에 전쟁의 현장과 그 후유증을 기록하고자 그곳을 찾은 미국인 여기자 로이스가 독실한 무슬림 통역을 통해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본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늦은 밤 나는 워싱턴 DC에 있는 내 아파트에서 TV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정치인들의 대담 프로였는데 주제에 따라 대화 내용에 아프가니스탄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했다. 어떤 날은 산악지대의 요새가 화염에 휩싸인 장면이 나왔다가 얼마 후 상황이 다소 '진정'되면 뉴스해설자들은 이란·카슈미르·소말리아 같은 분쟁지역으로 화제의 초점을 돌렸다. 한참 뉴스를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아프가니스탄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예전에 내 통역을 맡았었고 지금은 급히 구성된 아프가니스탄 국방부의 협상요원으로 활동중인 아마드 지아 마수드였다. 그는 탈레반 전사나 군벌 지도자 등 개혁 저항세력들과 협상을 벌이느라 산꼭대기나 마을, 동굴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종종 위성전화를 걸어오곤 한다. 20년 넘게 전쟁을 치르다보니 이들은 손에서 무기 내려놓기를 꺼린다. 간혹 마수드와 같은 협상요원들이 협박을 받거나 강제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군사들이 투입되고 산악지대에는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려 퍼진다. "지금 우리나라는 극심한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참상이 목격되고 있죠. 청년들이 아는 거라곤 전쟁밖에 없어요.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물론 식량도 공급되고 공장도 건설되겠지만 지금은 다들 고통받고 있어요. 평화가 찾아온다 해도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마수드가 내게 전하는 말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사진기자인 나는 작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아프간 북부에서 많은 시간을 마수드와 함께 보냈었다. 마수드는 탈레반 치하의 카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쫓겨난 지 8년째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북부동맹군의 지도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외국 기자들이 북부동맹군 본부가 있는 화자 바하우딘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북부동맹 외무부는 통역인들을 대거 소집했다. 내게 배정된 마수드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진 못했지만 아는 사람이 많아 발이 넓었다. 그는 독실한 무슬림으로 세 아이의 아버지였고, 나는 부르카를 쓰지 않은 미혼의 서양 여성이었다. 우리 둘 다 서로의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또한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바꿔놓을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시작부터 최전방 취재에 나섰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러시아 군사지도를 속속들이 숙지해야 했고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얼음장 같은 강을 건너야 했다. 또한 야전 사령관의 위성전화번호들이 잔뜩 적혀 있는 수첩을 지녀야 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검고 진한 차를 아무리 마셔도 탈이 나지 않을 만큼 장도 튼튼해야 했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박격포가 포탄을 퍼부어댔고 어떤 날은 고요했다. 미국이 탈레반 진지 공습을 개시하겠다고 발표는 했지만 우리가 접촉하고 있던 북부동맹의 최전방 지휘관들은 공습시기에 대해 통보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령관들은 진군을 멈춘 채 탈레반 점령지역이 공습으로 약화된 다음 공격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행동 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소강상태 덕분에 나는 최전방 이면의 세계, 즉 아프간 내전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취재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전쟁으로 야기된 예기치 못했던 '부작용들'을 기록하기 위해 마수드와 함께 동틀 녘부터 해질 녘까지 지프로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아프간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러 다녔다. 수백km의 여정을 함께하다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이야기들도 주고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