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살상무기
지난 세기에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은 대량살상무기들이 21세기에는 인류 문명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핵무기·화학무기·생물학무기들이 세계 도처에 남긴 끔찍한 상처를 살펴보고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사태의 시나리오를 읽어본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구소련은 1972년 미국을 비롯한 다른 100여 개국이 가입한 생물학무기금지협약에 서명했으나 약 10년 후 이를 어기고 카자흐스탄의 스텝지대인 스테프노고르스크에 대규모 생물학무기 공장을 서둘러 지었다. 지금 이곳에는 유리 루포프라는 사람이 책임자로 있는 바이오메드프레파라트라는 회사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거창한 이름에 비해 규모는 작았다. 영하의 날씨로 쌀쌀한 어느 날 아침에 그곳을 찾아갔더니 난방도 안 된 썰렁한 사무실에 루포프와 몇몇 직원들이 코트를 입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을 뿐 공장도, 기계도, 실험실도 없어 회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구소련 시절, 스테프노고르스크는 지도에 표기되지 않는 약 30개의 '비밀도시' 중 하나였으며, 바이오메드프레파라트라는 소련의 생명공학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곳에 지은 공장은 군사적 목적의 탄저균을 생산했다. 1996년부터 미국은 250만 달러를 들여 이 대규모 공장을 거의 다 철거했다. 그리고 남은 시설을 제약공장으로 개조해 옛 직원들을 복귀시킨다는 계획에 동의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루포프는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루포프는 자신을 비롯해 동료들이 다른 국가를 위해 선뜻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모두 소련과 공산당이 옳다고 믿게끔 교육 받았어요. 중동지역에 가서 일한다는 것은 우리가 거의 평생 신봉해온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죠." 하지만 한때 최고의 보수를 받으며 주택·음식·자녀교육·흑해 무료 여행 등 각종 특권들을 누렸던 구소련 엘리트들은 지금 직장도 없고 가족을 부양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이 아무리 투철하다고 해도 누군가는 결국 지식을 팔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루포프의 말에 따르면, 스테프노고르스크 공장이 철거될 무렵 남아 있던 680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 중 500명은 구소련군을 따라 러시아로 떠났고, 112명만 남아 미국에서 주는 급여를 받으며 공장 철거 작업에 참가했다. 그리고 16명은 미국에서 급여를 받으며 공장 잔해의 오염 수준을 측정했고, 나머지 52명은 인근에 신설된 의료기기제작 회사에 취직했다. 외국으로 일하러 간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그 중 주요 인물로는 한때 스테프노고르스크의 책임자였던 카자흐인 카나트얀 알레베코프가 있다. 구소련군 군의관이자 생물학자였던 알레베코프는 1992년 미국으로 망명해 구소련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과 관련된 끔찍한 사실들을 미 정부에 전했다. 그의 최고 업적은 기존 것보다 4배 강한 구소련 최강의 무기급 탄저균 '탄저 836'을 완성시킨 것이다. 1987년 실용화된 이 균은 굉장히 곱고 매끄러운 회갈색 가루여서 눈에 띄지 않게 수km나 퍼져나갈 수 있다. 이름을 미국식으로 켄 앨리벡이라고 개명한 그는 현재 버지니아주 북부의 한 생물학무기 회사의 수석 과학자로 재직하며 대학에서 미생물학 교수를 겸하고 있다. 앨리벡의 사무실을 방문해보니 그는 검은 터틀넥 티를 입고 연구비 신청서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여느 미국 학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망명자들 중에는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과장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소리를 나중에 듣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앨리벡도 같은 이유로 그의 망명을 도왔던 CIA 요원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그에게 현재 외국에서 일하는 구소련 생물학무기 과학자들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대부분은 러시아에 있습니다. 일부는 미국에 있고 유럽과 아시아에도 약간 있죠. 이란에도 두어 명 있을지 모르지만, 있더라도 극소수예요. 하지만 극소수라도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문제죠." 그는 악센트 강한 영어로 얘기했다. 현재 무직인 구소련 무기전문가들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기술을 팔아 넘긴다 해도 미국이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생각이다. 루포프는 린과 나를 카자흐스탄에 남아 있는 옛 시설물들로 안내하면서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은 공장을 없앨 때는 서두르더니 재건축할 시점이 되니까 시간만 질질 끌고 있어요. 우리도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