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라다비비:고산지대의 왕이라고?
<font size=2>고산지대의 왕이라고? 에티오피아 고산지대에서는 초식성 영장류인 겔라다비비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 사회에서는 수컷이 감히 암컷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는데, 바로 암컷들이 무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컷들의 위상은 어느 정도이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이들의 독특한 세계로 들어가보자.</font>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피트에게는 정말 괴로운 날이다. 퉁퉁 부어오르고 고름까지 질질 흐르는 왼손을 쳐든 채 나머지로만 기어다녀야 하는 데다 한 손으로 풀을 뜯어먹자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함께 사는 암컷 네 마리의 털을 손질해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설상가상으로 잘생긴 젊은 수컷 한 마리가 피트의 암컷들을 집적대고 있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상황도 있을까?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최악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거죠." 겔라다비비를 연구하는 호주 출신 야생동물학자 채든 헌터의 말이다. 겔라다비비는 비비만한 크기의 초식성 영장류로, 에티오피아 고산지대에서만 서식한다. 헌터는 바로 겔라다비비의 이런 행동을 보여주고 싶어 나를 산꼭대기까지 안내했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수컷의 행동 말이다. 헌터는 연구 대상으로 삼은 한 겔라다비비 무리 속에서 이런 자리다툼을 수없이 봐왔지만 대체로 어느 한쪽 편에 서는 것을 삼갔다. 그런데 차질이 생기고야 말았다. 헌터가 피트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피트를 관찰해왔어요. 그래서인지 이런 상황을 보기가 괴롭군요." 헌터의 말이다. 잠시 후 짝 없는 젊은 수컷 한 무리가 풀을 뜯어먹고 있는 겔라다비비들 사이로 달려들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녀석들의 연갈색 갈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송곳니가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녀석들은 털이 수북히 난 긴 꼬리를 곧게 펴 제 등을 톡톡 쳐댔다. 우리는 물론이고 겔라다비비들의 시선도 모두 녀석들의 행동으로 쏠렸다. "피트에게는 겁을 주고 암컷들에게는 환심을 사려는 행동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헌터가 내게 설명을 해줬다. 피트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왼손을 어색하게 쳐든 채 젖 먹던 힘을 다해 자기 암컷들 쪽으로 달려갔다. 녀석의 얼굴에는 헌터의 표현대로 "극도의 공포심"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녀석이 암컷들을 한데 모으려는 거예요. 그러나 암컷들은 그런 걸 아주 싫어하죠.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헌터는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저런, 피트! 그게 아닌데 ···." 피트의 암컷들은 녀석을 향해 잠시 꽥꽥거리더니 다시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휙, 휙, 휙. 암컷들은 잰 손놀림으로 싱싱한 풀잎을 뜯어서 연신 입에 집어넣었다. 겔라다비비 암컷은 수컷보다 가슴도 작고 멋진 갈기도 없지만 권력을 쥐고 있다. 피트가 무리 내에 머무느냐, 쫓겨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암컷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겔라다비비 사회에는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기본 법칙이 하나 있다. 바로 암컷들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겔라다비비('겔라다개코원숭이' 또는 '사자비비'라고도 함)는 한때 번성했던 초식성 영장류인 테로피테쿠스속(屬) 가운데 마지막 남은 종(種)이다. 약 300만 년 전만 해도 몇 종이 아프리카에서 인도에까지 이르는 영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몸집이 고릴라만한 종도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이 더워지고 초지가 감소하면서 에티오피아의 겔라다비비를 제외한 모든 초식성 영장류가 멸종해버렸다. 현재는 에티오피아 중북부 산악 초지의 선선한 고산지대만이 겔라다비비가 살기에 적합한 서식지로 남아 있고, 이 일대에 10만~20만 마리가 살고 있다. 비록 녀석들이 아직 멸종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나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서식지가 분산돼 있는 데다가 에티오피아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작지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초지와 경작지가 겔라다비비의 주요 서식지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시멘 산맥의 3050m 높이에 있는 고산 초지까지도 말이다. 이곳에서는 보리밭 근처에서 겔라다비비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겔라다비비는 정말로 마지막 남은 초식성 영장류죠." 헌터의 말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시멘 산맥 국립공원은 헌터가 1997년부터 겔라다비비를 관찰해온 현장이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숲 속 빈 터와 벼랑을 샅샅이 꿰고 있는 그는 "녀석들의 섭생, 행동, 사회구조 등은 다른 영장류와 상당히 달라요" 하고 말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시멘 산맥 특유의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와 절벽들을 올려다보며 "서식지도 깜짝 놀랄 만하죠" 하고 말을 이었다. 숲이나 저지대 사바나(열대 초원)에 사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영장류와는 달리 겔라다비비는 산꼭대기에서만 생활한다. 낮에는 시멘 산맥에서 가장 가파른 절벽을 따라 펼쳐져 있는 고산 초지와 트인 숲을 헤집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매와 수리들이나 날아들 법한 가파른 암벽의 좁은 바위턱으로 내려가 매서운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한데 모여 웅크린 채 잠을 잔다. 녀석들의 특별한 처지와 생활방식에도 불구하고 이 영장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는 편이다. 헌터의 연구 이전에 장기적인 겔라다비비 현장연구가 마지막으로 실시된 것은 25년도 더 전이었다. 그 당시 시멘 산맥에서 행해진 초기 연구를 통해 녀석의 독특한 행동 양식 상당수가 학계에 보고된 바 있으나 1970년대에 에티오피아가 기아와 전쟁, 그리고 반란 등으로 얼룩진 암흑기에 접어들면서 중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