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드디어 천하가 내 것이 되었도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기원전 202년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렇게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한나라에서는 유 씨 가문의 통치가 27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유방이 통치한 중국은 천하는 고사하고 현재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영역에 불과했다. 거친 성격에 흔해빠진 성 씨를 갖고 있었던(중국에는 유 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넘친다.) 유방은 학식 있는 유학자들을 경멸했다. 유학자들은 눈에 띄는 뾰족한 관을 쓰고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었는데 유명한 한 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 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유방이 이 고상한 유학자 중 한 명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 유학자의 관을 즉각 가로채 그 곳에다 오줌을 누었다는 것이다. 유방은 한 이전 왕조였던 진(영어의 'China'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의 말단 관리였다. 진은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고하고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왕조였지만 잔인한 통치를 계속하여 오래지 않아 멸망했다. 황제의 자리라는 것이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상황이 오자 유방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최대 적수는 항우라는 장군이었는데 그는 유방의 부친을 사로잡은 다음 유방에서 최후통첩을 내렸다.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아비를 산 채로 끓여 죽이리라." 유방의 대답은 간단했다. "국물이나 한 접시 보내라." 이 허세가 먹혀 들어가 유방의 아비는 국물이 되는 신세를 면했고 마침내 유방은 항우를 격퇴시켰다. 항우는 치욕을 피하고자 마지막 남은 그의 애첩과 함께 자살하게 된다. 승리를 거둔 유방은 도읍을 장안(영원한 평화라는 뜻)으로 정했는데 그 잔해가 오늘 날 사람들과 여행객들로 북적대는 시안(서쪽의 평화라는 뜻)에 여전히 남아있다. 6월의 어느 날 오후 나는 이 잔해들 중 하나인 약 15m 높이의 둔덕(유방의 궁전에 있던 자리)에 섰다. 33㎢를 아울렀던 장안 성벽의 일부가 솟아 나와 있는 들에서 농부들이 낫이나 콤바인을 이용해 밀을 수확하고 있었다. 유방은 '지엄한 선조'라는 의미로 '고조'로도 알려져 있는데(황제 사후에 종종 상징적인 이름들이 붙여졌다) 그의 궁전을 '영원한 기쁨'이라고 불렀다. '기쁨'이라고? 나는 폐허에서 아직도 비명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195년 유방의 사후에 황후였던 여후(呂后)는 유 씨 가문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자신의 가문을 황실로 삼으려고 했다. 그녀는 유방의 첩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을 죽이고도 모자라 유방의 애첩의 사지를 절단하고 그를 화장실에 가두어 버렸다. 황후는 다른 유 씨 친족들과 황실의 장군들을 그들의 봉토(관직의 녹으로 주어졌다)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친족들을 앉혔다. 유 씨 일족이 정권을 탈환하고 살아남은 유방의 아들인 문제를 황제로 앉히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유 씨 일족은 황후의 일족을 모조리 찾아내 없앴다. 아아 한 나라의 여성들이여! 황후나 첩들이 위험한 정치 놀음과 결탁하는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