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의 앞마당
많은 이들이 워싱턴 DC의 새로운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기념관의 건축을 저지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던 사람들을 비롯해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그렇지 않다. 내셔널 몰의 이용을 놓고 의견을 같이하는 데 미국인들은 항상 애를 먹어왔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랑팡의 웅대한 설계를 수정하며 1902 미 상원의원 제임스 맥밀런이 창설한 위원회는 확대 제작한 새 설계도를 가지고, 수십 년 동안 몰을 방치했던 것에 대해 종지부를 찍고자 시도했다. 피에르 샤를르 랑팡의 초안 설계는 자금 부족으로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종종 무시되었던 것이다. 철로, 발전소, 양어장, 빈민가, 사창가 따위가 이 지역의 외관을 망쳐 놓았다. 맥밀런의 설계도(위)에 따라 몰은 깨끗하게 정리되고 포토맥 강을 매립해서 만든 공원부지까지 몰에 포함해 길이가 길어졌다. 또한 백악관과 국회의사당과 함께 이 공간은 기념관들과 고풍스러운 건물들, 박물관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몰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국립공원관리청에서는 민간 트러스트를 통해 내셔널 몰의 개선작업 자금으로 3000만 달러를 조성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계획에는 리플렉팅 풀과 콘스티튜션 가든스 호수의 리노베이션 공사도 포함되어 있다. 1935 인부들이 몰의 경사를 고르고 있는 한편, 스미스소니언협회의 초대 회장 조셉 헨리의 동상은 1881년까지 이 협회의 유일한 건물이었던 캐슬(왼쪽 페이지 아래; 별도 지도의 ①)을 마주보고 있었다. 1935년 이전에는 일부 점유자들이 제멋대로 조경을 맡아 몰은 분할되어 있었다. 헨리가 1855년에서 1878년까지 살았던 캐슬에는 한때 동물들을 모아 둔 우리가 있었다. 1946 전시(戰時)의 폭발적인 도시 성장은 교통 혼잡을 야기시켰고 이에 급진적인 안이 나왔는데, 도심 순환도로와 함께 남북을 잇는 쌍둥이 고속도로와 지하도들을 건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몰은 도로의 중앙 분리대가 되었을 것이다. 2003년에는 워싱턴 기념탑에 지하 방문객 센터와 지하 출입구 터널을 만들자는 안이 논란 끝에 무산되기도 했다. 1865 남북전쟁이 끝나자 북부는 보복에 나섰다. 조지아 주 앤더슨빌의 남부연합 교도소 사령관인 헨리 비어스는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1963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 역사에 길이 빛날 명연설로 인종차별 철폐를 희망하는 25만 군중을 감동시켰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땅 1860년대에는 구불구불한 좁은 길들이 캐슬과 백악관 주변을 두르고 있었지만(오른쪽 별도 지도 참조), 몰의 미관보다는 악취가 더 문제였다. 여름이 되면, 도살된 가축과 쓰레기, 그리고 워싱턴 운하로 버려지는 하수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링컨 대통령은 도시 변두리의 '병사들의 집'으로 피신을 가야 했다. 1900년경 워싱턴 기념탑이 도시에 우뚝 솟아올랐고 운하는 사라졌다. 1940년의 지도를 보면 매립지에 세워진 링컨 기념관을 볼 수 있는데, 이 기념관은 레인보우 풀에서 끝나는 리플렉팅 풀 위로 근사한 풍경을 제공해 주었다. 그 무렵,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몇 개는 몰과 마주하고 있었다. 1920 링컨 기념관이 몰 서쪽 끝에 완공되었다. 링컨의 개인 비서 존 헤이가 살아 있었다면 무척 기뻐했을 일이다. 그는 말했다. "그는 불후의 존재였다. 링컨은 모든 미국인들 중 워싱턴 다음으로 그런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1943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효율성이 미관보다 우선이었다. 리플렉팅 풀 위로 통로들을 건설해 죽 늘어선 임시 군사 건물들을 이어 주었다. 이 건물들은 1970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철거됐다. 2004 최고의 위치를 자랑하는 제2차 세계대전 기념관은 레인보우 풀을 둘러싸고 있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전쟁터들을 상징하는 누각들이 전시(戰時)의 미국 주와 속령과 컬럼비아특별구를 나타내는 56개의 기둥을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 몰 구하기 전국연맹'의 주도 하에 이 건물의 건축을 막기 위한 법적 노력은 미 연방대법원이 심리를 기각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