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렝게티 사람들의 슬픈 사연
마사이족에게 세렝게티는 그들 말로 '영원히 계속되는 땅'이다. 하지만 이 야생지대의 핵심 보호지역 너머로는 인구 증가와 함께 그들의 야생의 땅이 사라지고 있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늘 독자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햇수 세는 법도 남들과 다르다. 우리의 열두 달이 그들에게는 2년이다. 1년은 풍요의 해, '올라리'로 탄자니아의 광활한 세렝게티 평원과 분화구 고지대에 찾아오는 우기에 해당되고, 그 이후 비가 그치고 시내가 마르면서 굶주림의 해, '올라메이유'가 시작된다. 이 때가 되면 100만 마리 이상의 누 떼가 먹을 것과 물을 찾아 우레 같은 발굽소리를 내며 북쪽으로 대이동을 시작한다. 이어 세렝게티 평원의 초목이 누렇게 말라 발 밑에서 바스러지면 마사이족 목동들과 전사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자산인 가축 무리를 이끌고 그들이 먹을 풀을 찾아 길고도 지루한 여정을 떠난다. 이 유목 사회에서 가축은 아직까지도 부와 풍요의 척도가 된다. 굶주림의 해가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난 7월 중순 무렵, 응고롱고로 분화구 위로 구름이 몰려왔다가 흩어지면서 햇살이 분화구 바닥에서 펼쳐지고 있는 생명의 드 라마를 비추었다. 황금빛 햇살 속에서 분화구 바닥의 사자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강바닥을 거닐며 풀을 뜯는 얼룩말 무리를 주시하고 있었고, 넓은 어깨에 좁은 엉덩이를 가진 외로운 하이에나 한 마리는 겁 많은 혹멧돼지들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치타 한 쌍은 키 큰 풀숲 속에 몸을 거의 숨긴 채 가만히 앉아 100마리 정도 되는 톰슨가젤의 동태를 주의깊게 살폈다. 천연소다의 채굴지로 유명한 마가디 호 상공에서는 날카로운 눈매의 독수리들이 호숫가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소금 구름 사이를 맴돌며 아침 풍경을 공중 정찰했다. 밤은 동물들의 차지였지만 날이 밝자 사람들이 분화구로 내려왔다. 마사이족은 수백 마리의 소 떼에게 물과 풀을 먹이기 위해, 생물학자들은 코끼리와 사자의 습성을 연구하기 위해, 그리고 관광객들은 다양한 야생동물과 마사이족 목부들로 명소가 된 동아프리카의 이 지역을 구경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과 야생동물, 그리고 가축이 이곳에 한데 모여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공존하며 살고 있었다. 서로 어쩔 수 없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소 떼가 처음 모습을 보인 건 8시경이었다. 모마라는 이름의 마사이족 전사가 이끌고 온 소 떼는 분화구 바닥으로 이어진 가파르고 좁은 길을 따라 줄지어 천천히 이동했다. 이 날도 모마는 소를 몰며 12시간이나 이동하는 힘든 하루를 보낼 것이다. 붉게 인 먼지구름으로 급경사길을 내려오는 모마 무리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그가 부르는 노랫소리와 경고성 휘파람 소리, 그리고 딸랑대는 소방울 소리는 더 커졌다. 마침내 그는 분화구 바닥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많이 걷는 생활방식과 부족한 식사량으로 대부분의 마사이족처럼 그도 마른 체격이었다. 먼지가 뿌옇게 덮인 가죽신을 신고 찬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색 토가(긴 겉옷)를 걸친 모습은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와도 같았다. 한 손에는 기다란 창을 든 채 그는 휘파람을 불어 80마리의 소 떼를 샘으로 인도했다. 소들은 샘에서 물을 마시게 놔 두고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분화구에 방금 도착한 관광객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여멀건 백인들이 이 날 이 분화구를 찾을 수백 명의 관광객 가운데 제일 먼저 도착한 무리였다. 그들은 모마를 보고는 카메라를 들어 찍어 댔다. 모마는 창을 들고 당당하게 포즈를 취해 보였다. 길게 땋아 내린 그의 머리는 햇빛에 반짝이는 알루미늄 구슬들과 막대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축 늘어진 귓불에서는 귀고리가 달랑거렸다. 그리고 동물 기름을 바른 얼굴은 번들거렸다. "이야, 이건 정말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과 똑같은걸!" 카메라를 든 무리 중 한 명이 또렷한 미국식 발음으로 감탄하며 외쳤다. 모마는 그에게 다가가 디지털 카메라에 저장된 자기 모습을 살펴보고는 그에게서 1000탄자니아실링(약 1000원)을 받아 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에게서도 비슷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 "사자가 당신의 소들을 공격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누군가 물었다. 모마는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쿵 내리찍으면서 "이 창으로 놈을 찌를 겁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마사이족은 역사적으로 사냥꾼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자기 가축을 지키는 데는 필사적이어서 필요한 경우, 사자 한두 마리를 죽이기도 한다. 모마는 거둬들인 지폐를 겉옷 안쪽 깊숙이 집어넣었다. 오전에 할 일은 끝났다. 그는 다시 선조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사자와 굶주림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온 건기의 겨울을 맞으며 자신의 소떼를 인도하는 깡마른 목부로 말이다. 한편 사파리 복장의 관광객들은 마치 탱크 지휘관들마냥 랜드로버(4륜구동 지프)의 천장 뚜껑을 열고 일어선 채 디젤 엔진의 뿌연 연기 속에서 덜커덩거리며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찾아 떠났다. 관광객들은 야생동물이 번성해 사는 모습을 이번 사파리 여행에서 보게 될 것이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중심부와, 이 공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에서 말이다. 탄자니아 북부의 2만 2000여km2 면적에 걸쳐 펼쳐져 있는 이 두 보호지역은 물결 치는 초원지대와 아카시아 숲, 그리고 안개로 덮인 화산 고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대형 육식동물의 최대 집결지이자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유제류 개체군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최근 조사 결과, 이곳 생태계의 핵심종인 누의 수는 약 120만 마리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수 년간 집계치 중 최고다. 이 영양류가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의 목초와 배설물, 무수히 찍어 놓는 발자국들로 세렝게티의 목초지는 매년 새롭게 부활한다. 이 털북숭이 동물은 사자, 하이에나를 비롯한 육식동물의 손쉬운 먹잇감이기도 하다. 20만 마리가 넘는 얼룩말은 이 지역 전체에 걸쳐 안정적인 개체 수를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말 상아 밀렵이 성행하면서 거의 사라졌던 코끼리들도 개체 수가 회복되어 현재는 2000마리가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검은코뿔소의 개체 수도 안정적이다. 사자는 한때 질병으로 개체 수가 줄었지만 지금은 3500마리로 다시 수가 늘고 있다. 임팔라와 토피영양, 일런드영양, 가젤, 기린, 아프리카물소의 개체군도 건강한 수준으로 수가 증가하고 있다. 개체 수가 줄고 있는 유일한 동물은 리카온과 혹멧돼지인 것으로 보인다. 야생동물 상당수가 절멸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두 보호지역의 상황은 아직까지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세렝게티 자체는 건강합니다." 탄자니아 정부에 자연보호 관련 자문을 해 주는 프랑크푸르트 동물학회 소속 프로그램 담당자인 크리스티안 셸텐은 말했다. "야생의 모습 그대로이며 별 이상 없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어조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좋겠지만 보호지역을 벗어나 야생동물과 사람들의 미래가 펼쳐지고 있는 좀 더 광범위한 세렝게티-마라 생태계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누 떼의 이동 경로로 경계가 규정되는 이 확장된 범위의 지역은 세렝게티를 둘러싸고 있으며 탄자니아와 케냐 남서부 약 2만 7000km2 면적에 걸쳐 있다. 다시 말해 동쪽의 분화구 고지대와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동아프리카 지구대)에서부터 세렝게티 내부의 초목이 우거진 평원과 삼림지대를 거쳐, 서쪽으로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숲과 구릉들의 좁은 생태통로를 따라 빅토리아 호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케냐 국경을 넘어 마사이마라 국립보호구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말한다. 북쪽의 마사이마라 국립보호구는 대이동을 하는 동물들이 건기 동안에 풍부한 목초와 물을 얻을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안식처다. 한때 사람이 거의 안 살아 세렝게티 야생동물들에게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이 생태계는 20세기 들어 탄자니아와 케냐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침식당하기 시작해 지금은 그 면적이 이전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1960년대 초 독립을 얻은 이후 인구가 세 배나 늘어 360만 명 이상이 된 탄자니아에서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는 늘어나는 사람들의 물결로 고립된 야생의 섬들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보호 받는 핵심지역 둘레에 조각조각 붙은 완충지역인 금렵구와 자연보호지역으로 계속 압박해 들어오고 있다. 가난한 농부들의 나라인 탄자니아에서 땅은 아주 귀하다. 개간된 국토는 5%도 안 되는데, 그 중 4분의 1이 국립공원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이 나라 인구의 거의 40%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몰래 들어와 건축용 자재와 땔감용으로 나무를 불법 벌채하고, 개체 수가 늘고 있는 토착 및 이동성 야생동물들을 사냥한다. 국립공원과 인접해 사는 탓에 탄자니아 원주민들은 야생동물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농장과 가축, 목화밭과 논이 국립공원 쪽으로 접근해 옵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총관리인 저스틴 한도는 말했다. "공원에서 80km 떨어져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과 5~6km 밖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그들이 불법 활동을 할 여지도 훨씬 커졌죠. 공원 안의 동물들은 늘 살아왔던 방식 대로 살려고 합니다.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한도는 말했다. "동물들은 사람들과 더 많은 상호작용을 하게 됐어요." 그런 상호작용이 항상 고무적인 것은 아니다. 몇 주 동안 나는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지역을 돌아보면서 인간과 야생동물 간의 갈등에 관한 많은 보고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로반다에서는 코끼리 한 마리가 활과 화살로 무장한 마을 주민을 밟아 죽이는 사고가 있었고,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질주하던 검은코뿔소들은 관광객 차량들이 너무 빠르게, 그리고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멀리 도망갔다. 밀렵꾼들은 누나 얼룩말 등 단백질이 풍부한 유제류를 잡아 식탁에 올리거나 돈이 되는 야생고기 밀거래를 위해 공원 서쪽 경계지역에 수백 개의 철사 올가미를 설치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보호지역에서 점점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야생고기 밀거래는 탄자니아 북부에서만도 연간 약 100만 명의 생계수단이 되고 있다. 값이 싸고 조용히 사냥감을 잡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밀렵꾼이 선호하는 철사 올가미 역시 동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인다. 지나가다가 운 나쁘게 올가미 안으로 발을 집어넣으면 바로 걸리는 것이다. 최근 세렝게티에서 기린 한 마리는 다리가 걸렸고 암사자는 목이, 그리고 누는 뿔이 걸려 잡혔다. 국립공원 외곽 서쪽 생태통로에서 올가미에 걸린 사자는 안간힘을 쓰다 빠져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뒷다리가 잘렸다. 이후 풀숲 사이에서 위풍당당하게 세 다리로 걷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목격되었다.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는 강인한 생존자의 모습이었다. 인구로 인한 압박이 덜했던 20년 전만 해도 세렝게티 과학자 중 밀렵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양이나 얼룩말, 누를 사냥하는 것을 밀렵이라고 부르는 건 옳지 않습니다." 프랑크푸르트 동물학회의 이 지역 담당 수석과학자인 마르쿠스 보르너가 1986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야생고기 밀매가 성행하면서 세렝게티 국립공원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공원에서 밀렵을 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최근 수년간 이 생태계에서 사냥되는 동물의 수는 매년 급증하고 있다. 사냥은 불법이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파악하기 힘들다. 밀렵되는 전체 동물 수는 연간 최소 4만 마리에서 최대 20만 마리로 추산되며 대부분이 누다. 20만 마리가 밀렵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생태계는 근본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비행기에서 나사를 그렇게 많이 빼내면 추락해서 땅에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죠." 그루메티 리저브의 대표이사인 리안 라부샨지는 말했다. 이 회사는 외부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최근 세렝게티 서쪽의 거의 11만 3000ha에 이르는 사냥 허용지대를 임대했다. 선물거래중개사이자 큰 포부를 가진 미국인 자연보호론자 폴 투더 존스의 자금 지원을 받아 그루메티 리저브 프로젝트는 탄자니아에 이미 20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한 상태인데, 그 목적은 이동성 야생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서쪽 생태통로의 서식지를 보존하고, 아프리카 원주민의 불법 사냥을 근절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공원 밖 어려운 마을들의 주민들을 돕는 것이다.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새 우물을 파고, 장학금을 제공하고, 관광업 관련 일자리를 만들고, 농부들에게 양봉과 양식 등의 영농 교육을 제공하면서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주민들의 밀렵을 막기 위함이다. 이 야심 찬 계획에 필요한 경비는 어떻게 마련할까? 간단하다. 광활한 사보라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계적인 일류 사파리 휴양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실내는 빅토리아조 양식의 고가구와 백만장자들로 가득 채우고 돈을 펑펑 써 대는 손님들에게 하룻밤 숙박비로 1500달러를 받아 내고 그들이 사자와 물소 사냥을 나가면 사냥 전리품에 대해 추가 수수료를 받는다. 헬스 스파와 테니스 코트 두 개, 요가룸, 최신식 헬스 시설, 그리고 그리스 키프로스 출신 요리사가 선보이는 고급 요리로 손님들을 대접한다. 절벽 끝에는 야외 수영장을 설치해 몸을 물에 담근 채 누 구경을 하며 확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그루메티 리저브의 운영 경비를 제외하고 남은 수익은 그루메티 펀드라는 자회사로 들어가 지역사회 개발과 보호에 사용될 것이다. "우리의 꿈은 다소 원대합니다." 라부샨지는 말했다. 7월의 어느 아침 우리는 우람한 아카시아나무의 시원한 그늘 아래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꾼들은 사사콰 로지에서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 18개의 침대를 갖춘, 번쩍이는 사사콰 로지는 그루메티 리조트의 중심 건물로 지금 막 첫 손님을 받았다. 라부샨지는 이 시점을 탄자니아 자연보호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 세계적 수준의 자원을 돌보면서 다음 세기까지 계속될 수 있을 만한 중요한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베테랑 자연보호주의자이기도 한 라부샨지는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검은코뿔소의 개체 수를 회복시키는 데 공적을 인정 받기도 했다. "우리는 테드 터너 같은 백만장자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가능한 한 많은 돈을 짜내고 싶습니다. 그들에게서 돈을 많이 뜯어 낼수록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지역사회에 환원할 겁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주머니에도 약간의 돈이 돌아갈 수 있겠죠. 그들도 뭔가 생기는 게 있어야 하니까요." 폴 투더 존스의 거금이 리안 라부샨지의 거창한 아이디어와 합쳐져 탄자니아에서 성공을 거둘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자연보호론자들은 그들이 성공을 거둘 것으로 조심스레 낙관한다. "국립공원 주변의 이런 모든 전이지역에는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셸텐은 말했다. "완충지역은 보고서 수치상으론 성과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현실은 좀 달라요." 적어도 일부 자연보호론자들이 보기에 그루메티 프로젝트는 과거에 실패한 방법들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다. "많은 이들이 스포츠 사냥을 끔찍한 짓으로 생각하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하고 적절한 사냥 쿼터만 제대로 지킨다면 지역 경제를 위한 수입원이 될 수 있습니다. 생태계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요." 하지만 모든 이들이 라부샨지와 그의 회사가 제시한 원대한 비전에 매료된 것은 아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서쪽 입구 바로 밖에 위치한 주민 수 2763명의 초라하지만 활기찬 마을 로반다에서는 그루메티 프로젝트에 대한 말만 나와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그들의 적이고 그들은 우리의 적입니다!" 마을 부회장인 케냐타 리처드 모사카는 말했다.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모사카도 그루메티 사람들을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고 자기들을 멀리 쫓아 버리려는 외지인으로 여긴다. 로반다의 이코마족이 멀리 가게 되면 대단히 독립적인 이 부족은 그루메티 리조트의 호화 사파리 사업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바로 라부샨지가 원하는 바이다. 그는 탄자니아 정부에서 이코마 야생동물관리지역을 지정하려는 계획들을 지지한다. 이 관리지역이 지정되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3만 9000ha 면적의 쐐기꼴 땅에서 사냥과 경작을 비롯한 모든 인간 활동은 엄격히 제한받을 것이다. "로반다가 여전히 문제죠." 그는 말했다. "인간 활동이 그곳 생태계를 갉아먹고 있어요." 그는 그 마을이 야생고기 거래의 온상이 되었다고 믿고 있고 이런 그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는 또한 로반다가 서쪽 생태통로에서 누의 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그루메티는 마을의 땅을 임대하고 로반다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주한다 해도 주민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자신들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계속 가질 것이고 새로운 야생동물지역의 관리에 대해서도 발언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만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땅의 가치는 높아질 것입니다." 라부샨지는 말했다. 모사카는 이 제안에 콧방귀를 뀐다. "그들은 우리가 사냥을 못하게 하려는 거예요. 우리 마을이 누의 이동을 방해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전보다 누의 숫자가 많아진 거죠? 그들은 이주에 드는 비용을 대겠다고 말했죠. 우리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백인만 봐도 화가 치밉니다." 로반다를 둘러싼 갈등은 역사가 깊다. 그 뿌리는 탄자니아가 영국의 식민지로서 탕가니카로 불리던 1951년, 세렝게티 국립공원이 설립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투어를 쓰는 수렵부족인 이코마족은 새로 조성된 국립공원 밖으로 내쫓겼다. 공원 안의 동물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쫓겨난 부족민들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로반다에 터전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렵에서 농경으로 생활방식을 전환하고 뿌리를 내리며 번성해 살았다. "우리는 전에 이미 한 차례 이주했어요." 모사카는 말했다. "다시 옮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루메티의 밀렵감시단은 마을 주민들과 몇 차례나 충돌해 왔다. 주민들은 매를 맞기도 하고 한번은 강간도 당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루메티 리저브 측은 이 혐의에 대해 일축한다. "그런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밀렵감시단의 단장인 브라이언 해리스는 말했다. "자," 라뷰샨느는 말했다. "이런 곳에선 경계선을 잘 지켜야 합니다. 법으로 제약을 가해야 하죠." 그래도 소용 없으면 공원의 서쪽 경계선 둘레에 울타리를 쳐서 코끼리 같은 야생동물과 늘어나는 인간 정착지 사이를 갈라놓을 필요가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BC 200년경 그리스·로마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사람들처럼 이 목축인들에게 울타리란 생소한 것이었다. 그런 초기 기록에 따르면 방목을 하는 이들 사하라 이남 사람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가축을 떠받들며, 우유와 소의 피를 주식으로 삼고, 죽으면 '웃으면서' 시신을 땅에 묻었다. 18세기 무렵 마사이족은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해 밸리 내부의 상당 지역을 장악했고 땅의 모습에 걸맞는 지명들을 만들어 붙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마사이족의 본거지 중심부에 붙인 '시링게트'일 것이다. 시링게트란 그들 말로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바로 세렝게티다. 세렝게티에 사는 마사이족에게 희망은 지평선만큼이나 끝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들에겐 경쟁자가 없었고, 계절에 따라 이동을 했고, 싸움을 즐겼으며, 어느 누구의 의견도 따르지 않았다. 자신들을 신이 선택한, 그래서 지구상의 모든 가축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부족으로 믿으면서 다른 부족들을 신나게 공격해 대며 가축을 빼앗았다. 이웃 부족들은 명성이 자자했던 그들을 멀리 했다. 아랍계 노예 무역상들은 그들의 지역을 피해 갔으며, 초기 유럽 탐험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자부심에 가득 차 남들과 떨어져 살았던 마사이족은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가뭄과 질병, 분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는 수천 명이 콜레라로 죽었고 뒤이어 1892년에는 천연두가 창궐했다. 그 후 마사이족의 재산이자 식량인 소들이 바이러스성 질병인 우역에 걸려 대다수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내전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마사이족의 장악력은 약해졌다.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케냐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탕가니카를 장악하자 마사이족은 전의를 거의 상실했다. 1929년 영국인들은 마사이족에게서 최초로 빼앗은 땅인 세렝게티에 320ha 면적의 금렵구를 조성했는데 그곳이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기반이 되었다. 마사이족은 거기서 계속 살았으나 1959년 토지 이용 문제를 놓고 공원 당국과 계속 마찰을 빚다가 영국인들에게 쫓겨났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소." 영국인들과의 협상에 참여했던 유일한 생존자인 올레 세루피는 말했다. "야생동물을 위한 장소를 만든다고 우리더러 나가라고 했지." 오렌지색 테니스화에 모포 세 개를 두르고 있는 이 힘없는 노인은 현재 마사이족 마을인 엔둘렌 외곽의 파리가 들끓는 거주지에서 염소 떼를 키우며 대가족과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응고롱고로의 분화구 고지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우린 이주하지 않겠다고 했지." 올레 세루피는 말했다. "세렝게티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고향이기 때문이야. 가축들도 그곳을 좋아했지. 사람들도 아주 좋아했던 곳이었어." 그는 나를 쳐다보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쫓아 냈어. 원로 중에서도 내가 제일 연장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내 손 아귀에서 세렝게티를 빼앗아 갔다고 할 수 있지." 올레 세루피는 자신의 오두막 옆 낮은 의자에 앉아 영국인들이 자기에게 이주의 대가로 새 땅을 약속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마실 물과 풀이 풍부해 더 살기 좋은 곳을 우리가 얻을 거라고 했지." 마사이족은 그런 땅을 전혀 얻지 못했다. 1959년 영국인들은 세렝게티 국립공원 동편에 있는 8000km2 면적의 땅을 떼어 이 목축인들이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 보호지는 올두바이 협곡 주변의 황량한 땅과 세렝게티와 인접해 있는 불모의 평원, 그리고 응고롱고로 분화구를 포함하고 있는 분화구 고지대의 일부 지역에 걸쳐 있다. 다용도 토지 활용을 위한 하나의 실험으로 이 새로운 구역은 마사이족과 그들의 가축, 특별한 야생동물들, 그리고 관광산업 개발을 위한 지대가 되었다. 거의 50년이 흐른 지금,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에서 야생동물과 관광객들은 번성하고 있지만 마사이족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그들의 문제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 세렝게티 서쪽 경계지역들에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을 야기해 온 바로 이 문제, 사람들은 많은 데 비해 자원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수치가 이것에 대해 말해 준다. 이 자연보호지역에서 마사이족 인구는 1954년 약 1만 명이던 것이 현재는 5만 명 이상으로 5배나 증가했다. 동시에 영역은 줄어들었는데 그들이 정착한 새로운 고향땅 중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던 분화구 바닥에서 1974년에 쫓겨난 것이다. 이런 문제들과 기타 개발 등으로 압박받는 마사이족은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이, 동쪽으로는 응고롱고로 분화구에 둘러싸여 있고, 사방에서 마을들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가축에게 풀을 먹일 수 있는 목초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 수에 맞춰 가축의 수를 늘릴 수도 없다. 그 결과, 아직까지 가축의 수가 부의 척도인 마사이족의 부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1960년에는 1인당 평균 가축 수가 26마리였던 것이 이제는 5마리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목축으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최소 규모의 경작 이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집약적인 농경이 이 지역의 자연 서식지를 훼손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는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 내에서 대규모 경작을 하는 것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 당국의 관광 담당 책임자 B. M. 무루냐는 말했다. "자연보호와 경작은 양립할 수 없어요." 탄자니아 북부에서 국립공원과 자연보호지역이 경작과 개발로 얼마나 많이 잠식당해 왔는가를 보면 우려를 할 만도 하지만 절박한 처지에 놓인 마사이족에겐 전혀 위로가 안 되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야생동물이 사람보다 나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분화구 고지대의 바람받이 구릉에 살고 있는 마사이족, 프랜시스 올레 시야파는 말했다. 우리는 얼룩말 줄무늬가 그려진 오두막 안에 앉아 휴화산 위로 피어오르는 구름을 지켜보았다. 시야파는 다른 많은 마사이족 사람들이 내게 말했던 것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야생동물만을 위한 땅이 아닙니다."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이곳을 다용도 지역으로 조성했죠. 이해하겠어요? 우리 마사이족의 자체적인 계획에 따라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관광산업을 개발하며, 이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을 결정하도록 허용해 주어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발언권이 없습니다." 시야파는 마사이족 가운데 자연보호지역 당국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없으며 자문위원회에서만 단 한 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지역에 마사이족이 압도적으로 많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의 사용에 대해 우리 스스로 계획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다른 탄자니아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우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탄자니아 최고 관광명소인 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수백만 달러의 혜택이 반드시 이 지역 사람들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내 의견을 말했다. 시야파는 나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한참을 침묵했다. 그는 킬리만자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병을 탁자 위에 놓더니 마침내 아주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서는 그런 돈을 거의 구경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사실은 마사이족 마을 엔둘렌의 붉은 흙길을 따라 늘어선 기우뚱한 판잣집들만 봐도 너무나 분명해진다. 집들은 바람이 한 번만 더 불면 날아가 버릴 듯 보였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 8000명 중 일부도 그랬다. 그들은 결핵과 영양실조, 말라리아를 앓고 있다고 이 지역의 유일한 병원 의사들은 말했다. "또 끓이지 않은 우유를 마셔서 걸리는 브루셀라증과 싸움으로 인한 골절상, 그리고 물소의 공격으로도 부상을 꽤 입지요." 80개 병상을 갖춘 엔둘렌의 선교 병원 의사인 자닌 허렌은 말했다. 그녀는 또한 에이즈 바이러스가 엔둘렌에 출현했다고도 말했다. 이곳 주민들도 세상 밖으로 나가고 있으며 새로운 문제들을 마을로 들여오고 있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둘렌에는 활기가 넘쳤다. 머리를 밀고 짤랑대는 은 목걸이를 한 여자들은 시장에서 오렌지와 양파를 고르고 있었고 붉은 겉옷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푸줏간 주인은 염소고기 덩어리를 가판대에 내걸며 고기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개 두 마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창을 든 전사들은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온도곰 강쪽으로 소 떼를 몰았다. 주민의 절반이 이 강을 다녀가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들은 옷을 빨아 가시나무에 널어 말리고, 아이들은 양동이에 물을 길어 학교로 가져가고, 당나귀와 소들을 몰고 온 목부들은 물가에 줄을 서서 그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목부들은 이 귀한 담수를 찾아 서너 시간을 걸어오기도 했다. "아무도 물 없인 살 수 없습니다." 평생을 엔둘렌에서 살아온 한 마사이족 사람은 말했다. 마을은 그 강에서 물을 얻는다. 정부가 이 지역에는 아무런 기반시설도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도움이 있건 없건 이 지역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 확장되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우린 50년 동안이나 물을 기다려 왔소." 엔둘렌 외곽에서 만난 한 원로인 라파엘 올로골리는 말했다. 우리는 깔끔하게 울타리가 쳐진 그의 집 마당 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마사이족이 국립공원에서 이주한 이후 정부는 물을 끌어다 주겠다느니, 학교를 지어 주겠다느니, 의료진을 보내겠다느니 따위의 약속을 해 왔지. 우리 부족은 굶주리고 있네. 사람들은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먹을 걸 달라고 해. 옥수수 가루 조금, 소금 조금, 설탕 조금. 하지만 결코 충분치 않아. 아무도 마사이족에게 단 하나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어." 반면 탄자니아 정부에서는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 내 영구 정착을 장려하는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지역은 마사이족 유목민이 그저 비중 없이 그 땅에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이 고정 수원지를 비롯해 정착 마을들이 가지는 편의시설들을 가지겠다니, 글쎄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자연보호지역 당국의 지역사회 개발 담당 최고 책임자 샘손 S. 음쿰보는 말했다.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하고자 하는 마사이족들을 위해 우린 응고롱고로 자연보호지역 밖에서 그들이 살 만한 지역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이전에도 두 번이나 쫓겨났던 마사이족은 또다시 이주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정부가 인정하든 안 하든 마사이족은 이미 응고롱고로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정착해 살면서 유목 생활로부터 정착 생활로의 느리고도 고통스러운 전환을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가축을 키운다. 그리고 그건 마사이족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소보다 염소와 양을 더 많이 키우고, 땅에서 돌아다니며 보내는 시간도 몇 주 혹은 몇 달에서 하루 이틀로 짧아졌다. 옛 방식은 사라지고 있다. 이웃 부족과 부족간 결혼도 행해지고, 소녀들의 할례와 젊은이들이 귓불을 길게 늘려 장식하는 풍습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 마사이족 땅에는 등산화와 스니커즈, 티셔츠가 전통의상과 샌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사이족의 토가 안쪽 깊숙이에서 울리는 휴대폰 소리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신세대들은 마을을 떠나 바깥 세상에서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압니다." 교육 받은 마사이족 중 한 명인 좀비 올레 키부요는 말했다. 그는 최근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전사의 창을 아루샤 주에 있는 아파트 한 채와 급료와 맞바꿨다. "하지만 내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장님이 된 기분이에요." 이 마사이족 청년은 자신의 인생길에서 비틀거릴지도 모르지만 살아남을 확률이 더 크다. 그의 조상들이 질병과 전쟁, 추방과 기아라는 혼란 속에서 살아남았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마사이족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하이에나의 힘줄만큼 질기기' 때문이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 다음 구릉을 찾아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그들은 그렇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