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메스너
글 : 캐롤라인 알렉산더 사진 : 빈센트 J. 무시
초인적인 굳은 의지로 라인홀트 메스너는 지구상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들과 그 밖의 여러 이상들을 정복하겠다는 비전을 이루고자 노력해왔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이탈리아 북부, 16세기에 지은 요새 성벽 너머로 우뚝 솟은 돌로미티케 산맥이 늦은 오후
석양에 붉게 물들었다. 성벽 안에서는 세계 최고의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가 산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의 열정적인 지휘 하에 포크레인 한 대가 흙바닥을 왔다갔다하면서 석판들을 옮겨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교하게 쌓았다. 작업이 끝나자 작은 산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성스러운 산, 카일라스입니다.” 포크레인이 일으키는 황금빛 먼지 속에서 라인홀트는 말했다. 그는 그 산의 모습을, 아니 전체 작업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감독 하에 완성된 티베트의 가장 신성한 산의 모형을 보며 흡족해할 뿐만 아니라 공사장의 온갖 굉음과 정신 없는 분위기, 먼지, 그리고 불가능처럼 보이는 엄청난 작업을 추진한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카일라스 모형은 ‘인간과 산이 만날 때’라는 주제로 그가 세운 메스너 산악박물관의 기발하고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전시물들 가운데 하나다.
이미 경이로운 인생을 살아온 라인홀트 메스너이지만 그는 또다시 스스로 자기 인생의 ‘제6기’라 칭한 삶에 몰입해 있다. 제1기에는 세계적인 암벽등반가로 성공했고, 제2기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고산 등반가로 명성을 굳혔지만, 그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는 듯하다. 라인홀트는 현재 62세로, 지난 30년 동안 찍은 무수한 홍보용 사진들 덕분에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마르고 탄탄한 몸에, 희끗희끗 백발이 섞인 텁수룩한 수염과 젊을 때보다 길어진 곱슬머리는 제우스 신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등반가가 아닌 사람에게 라인홀트 메스너의 업적과 그 위대함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지 모른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5년, 메스너는 오랜 등반 파트너인 페터 하벨러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8068m 높이의 가셔브룸 1봉인 히든피크를 짐꾼이나 캠프, 고정자일, 산소통 등 그 때까지 고산 등반에 당연히 사용하던 어떠한 장비도 없이 등정함으로써 등반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는 찬사를 받았다. 3년 후인 1978년 5월에 두 사람은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면서 등반의 절대 한계에 도전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에는 메스너 혼자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높은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한다. 이것은 등반사상 가장 용감한 등반 중 하나로 보도되었다. 또다시 2년 후에는 작은 배낭 하나만 달랑 짊어지고 보조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 산을 단독 등반한다.
“고산 등반에서 순위를 매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14개의 8000m급 산, 즉 14좌 중 7좌를 메스너와 함께 등반한 한스 캄머란더의 말이다. “심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초시계로 재는 것도 아니죠. 불, 헤르조그, 포러 등 다른 사람들도 해냈구요.” 세계 산악계 거장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그는 말했다. “단독 등반은 그들이 더 많이 했죠. 하지만 라인홀트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았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죠. 그는 그것들을 먼저 머리 속에 그려 본 다음 실행에 옮겼어요. 그 모든 걸 감안하면, 그래요,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가로 기록될 자격이 있습니다.”
메스너가 세계 산악계에 남긴 공로는 줄줄이 이어지는 놀라운 위업만이 아니다. 그 이면에 놓인 확고한 철학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건 인간의 경험이지 산이 아닙니다. 난 자연주의자가 아니에요.” 메스너는 내게 말했다. “난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 윌리엄 블레이크는 인간과 산이 만날 때 위대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했죠.” 18세기 시인이 쓴 이 시구는 그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이자 그가 세운 박물관의 설립 철학이기도 하다. “에베레스트에 고속도로가 나 있다면 산을 만날 수 없습니다. 모든 걸 준비하고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 줄 안내인을 대동한다면 산을 만날 수 없어요. 산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모든 걸 혼자 힘으로 감당하는 겁니다.”
그의 나이 겨우 23세 때 쓴 수필에서 그는 볼트와 자일에 의지해 아마추어 등반가라도 산을 정복할 수 있게 하는 ‘포위전법’에 대해 비난한 바 있다. 산은 ‘(인간의 도전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게 되고 등반가는 자신의 용기와 기술의 한계를 시험해 볼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가능 죽이기’라는 제목의 이 수필에서 그는 확장볼트와 피톤을 사용하는 등반가들이 ‘아무 생각 없이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여지를 죽여 버렸다’고 주장했다. 메스너는 산에 오를 때 산소통 없이, 그리고 암벽에 확장볼트도 전혀 박지 않으면서 자신이 설파한 미니멀리즘 원칙들을 멋지게 실천해 보였다. 이렇게 최소한의 인원과 물량으로 짧은 시간에 등반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 원정대를 꾸리는 기존 방식에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등반가뿐 아니라 산도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런 위업들을 통해 ‘불가능’으로 간주된 모든 통념들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메스너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대단한 일을 해낼 때마다 뒤따라 출판된 수많은 책과 대중에게 어필하는 잘 생긴 구릿빛 외모 덕분에 등산계에서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유럽에선 잦은 TV 출연으로 계속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종종 거리낌 없는 의사 표현으로 대중을 자극하곤 했다. 그의 숭배자들은 록스타에 열광하듯 갈채를 보냈고 비방자들은 자기 선전에 열을 올린다며 그를 싫어했다. 메스너는 양편 모두를 열렬히 환영한다. “장애물은 내게 활력을 불어넣죠.” 그는 말했다. 줄기차게 논쟁을 일으키는 그는 불같이 화를 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너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더니 거기 있던 창문들이 떨더군요.” 원수지간 같은 이웃과 마주쳤을 때의 일을 회상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지금의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들, 즉 장애물과 위험, 그리고 아드레날린 수치를 높이는 분노는 어린 시절부터 라인홀트에게 큰 영향을 미쳐 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라인홀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늘 주장하는 이탈리아 북부 남티롤 주 필뇌스 골짜기의 작은 마을, 세인트페터스에서 그는 태어났다. 골짜기에 펼쳐진 고산 초원 위로 가이슬러스피첸 산맥의 뾰족뾰족한 바위 봉우리들이 머나먼 동화 속 왕국의 뾰족탑들처럼 신비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내가 등반을 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 사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라인홀트는 말했다. “먼저, 아버지가 등반을 했죠. 익스트림 등반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부터 등반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두 번째 요인은 이 골짜기에 축구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는 것이죠. ··· 수영장도 없었구요. 나를 표현할 활동이라곤 바위를 오르는 것밖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일찍부터 등반을 익혔죠.” 라인홀트가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이슬러스피첸 산맥의 900m 정상을 힘겹게 오른 때는 다섯 살 때였다. 13세가 되자 등반에 대한 관심이 아버지를 능가했고 등반을 자기 진로로 삼았다.
남티롤 지방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이 지역의 정체성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의 문화로 섞여 있다. 지금도 이곳 골짜기와 마을에서는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지명을 모두 쓰고 있으며, 대부분의 가정이 메스너 집안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어를 사용한다. 라인홀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트로이는 당시 여자치고는 교육을 많이 받은 편이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라인홀트는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생계 유지에 급급했던 그 시절에 이 골짜기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녀는 모진 풍파를 겪은 한 가정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힘으로 여러 차례 묘사되곤 했다.
아버지 조세프 메스너는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아들들과의 관계도 복잡했다. 어린 시절, 조세프는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교사가 되었고 마리아 트로이와 결혼해, 장인 소유의 주택 위층에 살았다. 거의 2년마다 아기가 생겨 식구는 계속해서 불어났다. 난방과 취사는 부엌에 있는 난로에 장작을 때서 사용했고 아래층이 정육점이었기 때문에 집 옆에 있는 헛간은 도살장으로 쓰였다. 이 골짜기에 사는 여러 가정들처럼 메스너 일가도 채소와 닭을 키웠으며 사내아이들은 닭 잡는 법을 익혔다. 외동딸인 발트라우트는 집 안에서 어머니를 도왔고 사내아이들은 나무와 돌을 나르면서 바깥 허드렛일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각자 바로 아랫동생을 돌봐야 했는데 메스너는 동생 귄터를 챙겼다. 험준한 티롤 지방의 여느 가정들처럼 메스너 집에서도 각자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아버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지만 칼뱅주의를 신봉했어요.” 라인홀트의 전부인인 우어줄라 데메터는 말했다. 그녀는 지금도 라인홀트나 그의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머님은 조용하고 온유한 성격에 자기 운명은 하느님이 결정한다고 믿는 운명론자였어요. 하지만 아버님은 돈을 못 벌거나 성공하지 못하면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거라 여겼죠.”
조세프 메스너의 삶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노선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1938년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동맹을 맺으면서 그들은 남티롤인에게 투표를 통해 선택권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라인홀트는 말했다. “이탈리아를 선택하면 그대로 머물고, 히틀러를 지지해 독일을 선택하면 이곳을 떠날 수 있는데 여기서 소유하고 있는 땅과 같은 면적의 땅을 독일에서 받게 될 거라고 했죠. 아버지는 독일 쪽으로 투표하도록 선동한 조직원이었어요. 투표 결과 남티롤인 86%가 고향을 떠나 나치 당원들과 독일에 가기로 했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믿기 힘든 일이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이런 선택의 상황도 끝이 났다. 조세프 메스너는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이 되어 독일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전시 임무는 이탈리아어 통역관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시 이 골짜기에 살고 있던 부인 집으로 돌아와 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베르너, 라인홀트, 지그프리트, 발트라우트 등 독일어 이름으로 지어 준 아홉 자녀를 부양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걱정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라인홀트의 남동생이자 런던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는 한스외르크 메스너의 말이다. “걱정은 아버지를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죠. 가혹한 건 아니었지만 어떤 때는 엄했어요. 아버지의 엄한 성격은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나타난 폭력의 형태는 당시 시골에선 흔했던 매질과 신랄한 욕설이었다. “아버지는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굴욕감을 느끼게 했어요.” 한스외르크는 말했다. 라인홀트가 학교 공부는 등한시하고 등산에만 시간을 보내 학교 시험에 낙제하자 아버지는 심한 모멸감을 주면서 그에게 폭언을 퍼부어 댔다. “형이 부엌 나무식탁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한없이 울던 생각이 납니다.” 한스외르크는 말했다. 그 순간은 아버지의 승리였을지 모른다. 그가 옳다는 것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 고집불통 아들에게 그가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일, 즉 등산만 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몇 년 동안 누누이 강조했다.
“우리 집에선 단 한 가지 선택밖엔 없었어요.” 라인홀트는 말했다. “부러뜨리거나 부러지거나, 아니면 아버지보다 강해지는 거였죠.”
라인홀트와 귄터가 각각 13세, 11세가 되었을 때 둘은 완벽한 등반팀을 이룬다. 둘 다 나이에 비해 튼튼했고 재능이 있었는데, 성격은 판이했다. 형 라인홀트는 외향적이고 공격적이며 나서는 걸 좋아하는 데 반해 동생 귄터는 내성적이었다고 볼차노 병원 신생아과 과장으로 있는 라인홀트의 또 다른 동생 후베르트 메스너는 말했다. “형은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봤어요. 귄터는 그렇지 않았죠. 귄터가 아버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게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귄터는 ‘하기 싫어요, 안 할래요’라는 말을 못했어요.”
라인홀트와 귄터는 가이슬러스피첸의 가파른 바위 봉우리들만 오르다 돌로미티케의 다른 봉우리들로 진출했고, 더 나아가 서부 알프스의 전통적 등반로들로 영역을 확대했다. 돌로미티케에서 그들은 프리 스타일의 암벽 등반을 마스터했고, 알프스에서는 혼합 지형과 얼음 위를 등반하는 경험을 쌓았다. 라인홀트가 20세, 귄터가 18세가 되자 이들은 유럽의 정상급 등반가들과 실력을 비길 만한 수준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등반할 기회가 있거나 유명한 등반가가 올랐던 비슷한 루트로 올라갈 때 난 그저 그들을 잘 관찰하면서 배우기만 했어요.” 라인홀트는 잠시 말을 멈춘다. “몇 년간은 그랬죠. 그리고 20세, 23세쯤 됐을 땐 아무도 우리만큼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형제는 계속 함께 등반했지만 라인홀트는 가능한 한 짐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고 번개 같은 속도로 혼자서 정상에 오르곤 했다. “1965년부터 1970년 이후까지 라인홀트가 단독으로 돌로미티케를 등정한 기록은 그의 등반 경력 중에서도 최고급이었어요.” 같은 남티롤 출신의 한스 캄머란더는 말했다. “그런데 이 시절의 경력은 종종 간과되곤 합니다.”
라인홀트와 귄터가 주목할 만한 등반 기록을 쌓아가면서 한스외르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라인홀트의 ‘승리주의’는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에 TV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어 우린 그곳에 가서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 시합을 보곤 했어요. 알다시피 알리는 시합 때마다 ‘6라운드에 때려눕히겠어’라는 둥 경기 결과를 호언하곤 했잖아요. 그 때부터 라인홀트도 그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죠. ‘10시간 안에 아이거 벽 정복!’ 이런 식으로요.” 한스외르크는 말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빠르게 오르는 라인홀트의 등반 스타일은 그의 초인적인 스피드에 기인한다. 그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느냐는 이후 몇 년간 수차례에 걸쳐 극적으로 여실히 드러난다. 한 예로, 1979년 네팔의 아마다블람 원정 때 라인홀트와 그의 친구인 오스발트 욀츠는 위대한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아들인 피터 힐러리와 두 명의 동반자를 멋지게 구조해 냈다. “라인홀트는 그 뉴질랜드 등반가들이 이틀 반 걸려 올라간 거리를 6시간 만에 갔어요.” 구조 활동을 목격한 네나 홀귄의 말이다. “그는 눈 속을 번개같이 이동했죠. 사슴처럼 사뿐사뿐 가볍게 올라가더군요. 발이 땅에 거의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죠.”
라인홀트와 귄터는 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내키진 않았지만 직업 훈련을 위해 라인홀트는 파도바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귄터는 은행 업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진짜 교육은 암벽에서 계속됐다. “나는 며칠씩 밖에서 지내는 훈련도 했습니다. 계속 굶으면서요.” 라인홀트는 말했다. “우리는 식량을 챙기지 않고 산을 올랐어요. 우리가 지고 가야 하니까 아예 안 갖고 가는 걸 익힌 거죠.” 두 형제는 또한 라인홀트의 말처럼, “상황에 대처하는” 법이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법도 배웠다.
“용기는 두려움의 이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했다. “두렵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한 거죠.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나는 이미 그 비전 속에 살고 있고, 비전에 대해 꿈꾸고, 계획하고, 준비하고, 훈련합니다. 준비가 철저히 된 상태이고 오랫동안 도전과 비전, 그리고 꿈을 품으며 생활하다가 등반을 시작하면, 특히 거대한 암벽을 오를 때면 나는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됩니다.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죠. 내가 매달려서 오르고 있는 몇 미터 높이의 벽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집중해 있으면 모든 것이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여요. 위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위험은 사라지죠. ··· 오로지 완전한 몰입만 남습니다.”
1969년 라인홀트는 건축학 학위를 받은 후 중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는 순전히 등반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도 히말라야 원정에 합류하지 않겠냐는 초청을 받는다.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라인홀트의 인생을 두 단계로 봅니다.” 한스외르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낭가파르바트 등정 이전과 이후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