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

인스타그램 보기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 키즈

매거진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하이쿠 거장

글 : 하워드 노먼 사진 : 마이클 야마시타

17세기 일본의 하이쿠 성자 마쓰오 바쇼의 유랑길을 따라가보면 그의 시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나날이 방랑길이요, 방랑길이 바로 내 집이다.” 일본 하이쿠의 거장 마쓰오 바쇼가 300여 년 전, 명저 ‘오쿠노 호소미치(동북기행)’ 도입부에 쓴 말이다. 이 명망 높은 시인이 1689년 일본을 유랑하며 걸었던 2000km 길을 답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이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만 해도 막막한 여정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이자 교토 토박이 언어학자였던 헬렌 다니자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땐 누구나 바쇼의 시 한 수쯤은 암송할 수 있었어요. 처음으로 문학 작품을 신나게, 혹은 진지하게 읽게 해준 작가였죠.” 오늘날 수천 명이 바쇼의 생가와 묘소를 방문하고 그의 유랑길을 여행한다. 300년도 지난 지금, ‘오쿠노 호소미치’는 수개국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처럼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시대에 사는 독자들은 바쇼가 종종 토로한 막연한 우울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쇼 또한 급변하는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의 허무감은 시를 더욱 애틋하게 만들었다. 그를 방랑길로 내몬 것도 결국은 이런 허무감이었다.
바쇼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는 적지만 1644년 교토 남동쪽에 있는 작은 성 우에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하급 무사였던 아버지는 아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형제자매들은 농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쇼는 문학에 흥미를 느낀다. 주군이었던 영주의 아들에게서 받은 영향일 것이다. 교토의 유명 시인 기긴에게 시작법을 배운 그는 젊은 시절에 평생의 문학적 토대인 중국 시와 도교 사상을 접한다. 주군이 세상을 뜨자 바쇼는 교토에서 지내며 여러 사람이 짧은 시구를 이어 짓는 ‘하이카이’라는 정형시를 익힌다.
당시 하이카이의 제1구(句)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바로 무운(無韻)의 5·7·5 삼행시에 자연의 본질을 담고자 한 하이쿠다. 바쇼는 다양한 필명으로 초기 하이쿠들을 발표했는데, 필명마다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한 예로 ‘푸른 복숭아’를 뜻하는 ‘도세이(桃靑)’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흰 자두’라는 뜻)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쓴 필명이다.
바쇼는 20대 후반에 지금의 도쿄인 에도로 갔다. 당시 에도는 큰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던 신생 도시였다.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이 활발한 이곳에서 바쇼의 문학적 지평이 열렸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의 문하에 많은 제자와 후원자가 모여들어 바쇼파로 알려진 동인회를 조직했다.
1680년, 한 제자가 스미다 강 부근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어주었고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제자가 바쇼(바나나의 일종인 파초) 나무를 선물했다. 이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바쇼’라는 필명을 썼다. 어느 믿을 만한 기록에서는 그가 이 시기에 정신적인 번민에 시달리다가 선불교에 파고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682년, 에도의 대부분을 태워버린 대화재로 집이 잿더미가 되자 그는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이때 심정을 시로 읊었다.

포토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