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글 :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국 사진 : 제임스 P. 블레어 외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의 서쪽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로, 섬 동쪽의 도미니카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개요공식 명칭: 아이티 공화국
정부 형태: 준대통령제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구: 1175만 명(2024년 기준)
공용어: 프랑스어, 아이티 크레올어
통화: 구르드
면적: 2만 7750㎢(한반도의 8분의 1)
지리
아이티는 카리브해와 북대서양 사이에 있는 히스파니올라섬의 서쪽 3분의 1을 차지하며, 섬의 동쪽 3분의 2를 차지하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국경을 접합니다. 아이티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로는 서쪽의 자메이카와 북서쪽의 쿠바도 있습니다.
아이티는 토착민의 언어인 타이노어로 ‘산들의 땅’을 뜻합니다. 아이티 남동부의 마시프드라셀산맥에 위치한 피크라셀은 아이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해발 2680m입니다.
히스파니올라섬은 지질학적으로 판 경계대, 즉 지구 표면 밑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암석판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판이 움직이면 지진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판 경계대에 놓인 아이티는 매우 강력한 지진을 자주 겪었고 이로 인한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2021년 8월 규모 7.2의 강진이 아이티를 강타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지진으로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5만 채에 육박하는 건물이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자연
아이티는 연중 따뜻한 열대 기후입니다. 국토 대부분이 산악 지대이지만 코코넛나무가 늘어선 해안은 평평합니다. 높이 약 18m까지 자라는 왕야자나무도 흔합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개발할 땅이 필요해지자 많은 나무가 베어졌습니다. 이곳에서 나무는 땔감으로 많이 쓰입니다.
숲의 대부분이 사라진 아이티에서는 폭풍과 허리케인으로 인한 홍수가 전국적 피해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히스파니올라섬 주변의 따뜻한 바다에서 자주 발생하는 허리케인은 막대한 피해를 남깁니다. 최근 발생한 허리케인 가운데 2012년의 ‘샌디’와 2016년의 ‘매슈’는 홍수와 산사태를 일으켜 수천 명이 집을 잃기도 했습니다.
아이티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합친 것보다도 작지만 기후대는 꽤 다양합니다. 건조림에는 여러 종의 선인장이 자라고, 해안 맹그로브 숲에는 쿠바홍학이 서식합니다. 두 국립공원인 ‘라비지트’와 ‘피크마카야’는 각각 열대림과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코뿔소이구아나와 히스파니올라왕뱀, 그리고 아이티의 국조인 히스파니올라트로곤 등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입니다.
아이티 해안에서는 서인도제도바다소와 병코돌고래, 그리고 카리브암초상어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
히스파니올라섬에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온 원주민이 거주했습니다. 초기 정착민 중에는 타이노족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남긴 동굴 벽화는 전국에 흩어져 있으며 아이티의 국가 상징이자 관광 명소입니다.
1492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섬에 상륙해 이를 스페인의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곧이어 도착한 수백 명의 스페인 정착민들은 섬의 원주민을 몰살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 와 이곳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17세기에는 프랑스인들이 식민지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식민지의 명칭도 프랑스어인 ‘생도맹그’로 바뀌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에서 커피, 면화, 사탕수수 등 다양한 작물의 생산량을 늘렸습니다. 하지만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1791년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아이티 혁명은 노예들의 봉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역사가들이 평가합니다. 혁명의 결과, 섬 주민들은 1804년 마침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의 이름을 아이티로 고쳤습니다.
아이티는 카리브해의 첫 독립 국가였습니다. 대부분의 카리브해 지역은 당시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아이티는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민주주의 국가였고,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왕이 없는 정부 형태)이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식민지 지배를 오래 경험한 아이티에는 제대로 된 정치 체제가 자리 잡지 못했고, 그 결과 오랜 기간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1809년에는 섬의 동쪽 지역(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이 다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이티 대통령들은 안정적으로 집권하지 못했습니다. 1915년까지 봉기가 숱하게 일어나 정권이 몇 번씩이나 바뀌었습니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는 미국 해병대가 파나마 운하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자 아이티를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파나마 운하는 중앙아메리카 파나마에 있는 인공 수로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합니다.
1957년부터는 뒤발리에 일가의 독재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95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독재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통치권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그의 19살 난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국민투표를 거쳐 후계자가 되었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아이티를 통치했습니다. (아버지 뒤발리에는 ‘파파 독’, 아들 뒤발리에는 ‘베이비 독’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습니다.)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재임기 동안 아이티는 극심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정권에 반항하는 사람들은 종종 죽임을 당했고, 많은 아이티인이 열악한 환경을 피해 조국에서 도망쳤습니다. 뒤발리에 정권은 마침내 1986년에 무너졌습니다.
1990년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아이티 최초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대통령직은 1995년 르네 프레발이 후임으로 당선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아리스티드는 2000년에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아이티는 극심한 폭력 사태, 정치적 부패, 식량 부족을 겪었습니다. 2004년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아리스티드는 대통령직을 내놓고 망명을 떠났습니다. 이후 여러 명의 대통령이 재임했으나 대부분 아리스티드처럼 논란이 많은 인물들이었습니다.
2017년 바나나 수출업자 출신인 조베넬 모이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 또한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부패한 지도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2021년 2월 모이즈에게 대통령직을 사임하도록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그는 시위대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같은 해 7월 7일 모이즈는 결국 자택에서 암살당했습니다.
모이즈는 암살당하기 이틀 전 미국에서 공부했던 의사인 아리엘 앙리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앙리는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서 다음 대통령 및 의회 선거일까지 정부를 이끌었으나, 2021년 11월 7일로 예정되었던 선거는 결국 치러지지 못했습니다. 2023년 1월부터는 의회의 상원과 하원 모두 공석이 되면서 아이티 정부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2024년 4월에는 앙리 총리가 사임하고 과도위원회가 출범했으나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여전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과 문화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 중 하나로, 1㎢당 380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인구의 다수는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노동자이지만 도시 지역의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포르토프랭스는 아이티의 수도이자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로 약 300만 명이 거주합니다.
대부분의 아이티인은 아프리카계 혈통이며 극소수의 유럽계 혈통도 섞여 있습니다. 아이티 크레올어는 프랑스어와 아프리카의 여러 언어가 혼합된 언어로, 이 나라의 공용어이며 인구 대부분이 사용합니다. 프랑스어도 공용어이지만 아이티인의 약 10%만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아이티인의 삶에서 부두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부두교는 서아프리카의 민간 신앙과 로마 가톨릭의 성인 숭배가 혼합된 종교입니다. 아이티에서 흔히 하는 말로 ‘가톨릭교인이 아이티인의 70%, 개신교인이 30%라면, 부두교인은 아이티인의 100%’입니다. 2003년 아이티 정부는 부두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오늘날 정부는 부두교 전통을 따른 결혼식과 기타 의식을 법적으로 인정합니다.
아이티 전통 음식은 양배추, 망고, 구아바 같은 현지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 그리고 매콤한 고기 요리로 이뤄집니다. 인기 있는 요리로는 그리옹(향신료와 양념에 절인 돼지고기), ‘종종’이라는 버섯으로 만든 흑미밥, 그리고 아이티식 패티(닭, 소고기 또는 물고기를 속에 채운 감칠맛 나는 파이)가 있습니다.
정부와 경제
아이티는 준대통령제 공화국입니다. 국가 지도자의 역할은 대통령이 수행하며,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총리가 별도로 존재합니다. 아이티의 대통령은 5년마다 국민의 다수결 투표로 선출됩니다.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인구의 약 60%가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아이티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빈곤한 나라에 속합니다. 아이티 정부는 식량 공급과 의료, 그리고 자연재해 피해 복구에 필요한 자금을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외국으로부터 받는 지원에 의존합니다.
대부분의 아이티인은 농업에 종사합니다. 의류 공장은 수천 명의 아이티인, 특히 여성을 고용해 전 세계로 수출되는 제품을 생산합니다. 주요 기타 수출품으로는 커피, 망고, 사탕수수, 쌀, 옥수수, 목재 등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