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먼저 그는 먼저 자신의 부왕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페르시아 만의 부유한 국가 카타르의 통치자는 이제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를 왕의 칙령으로 근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카타르의 현대화는 아들이 아버지를 왕좌에서 축출하는 구시대적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1995년 6월 말, 연안에 위치한 수도 도하에서 티크와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왕궁 위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을 때 사건은 발생했다. 나이 많은 셰이크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은 장남인 하마드 왕세자(45)에게 국정을 맡기고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새벽 5시 30분경 밤을 꼬박 새운 하마드 왕세자는 왕실 각료들을 비롯해, 카타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들 및 주요 부족들의 대표들 앞에 서서 전권 장악을 선언했다. 어떠한 저항세력도 없었으며 심지어 놀라는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마드가 베두인 전통에 따라 사전에 그들과 협의를 마친 후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금색 테두리를 두른 갈색 예복에 흰색 카피에(아랍 남성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를 늘어뜨린 고관대작 100명이 앞으로 나와, 왕과의 혈족관계에 따라 국왕의 머리나 어깨, 뺨이나 코에 입을 맞췄다. 그보다 몇 주 앞서, 카타르의 지배세력인 알-타니족의 친족회의에서 하마드 왕세자의 의견은 지지를 받았는데, 사치와 술에 탐닉하는 그의 부왕은 카타르의 세습 왕조를 계속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합의를 통해 하마드는 그 해 6월 새벽,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궁 위로 태양이 완전히 떠올랐을 즈음엔 할리파 국왕의 23년 간에 걸친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왕자들 중 부왕의 총애를 받는 왕세자였던 새 국왕은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미 소식을 접한 할리파는 분노하며 통화를 거부했다. 그것으로 상황이 종결된 건 아니었다. 8개월 후 할리파 전 국왕은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이웃 나라들의 지원으로 반군을 투입해 권좌에 복위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시도였다. 할리파 전 국왕의 지지자들에 의해 징집된 600명의 베두인족 사람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카타르로 왔지만 국경을 넘은 뒤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말았다. 한편 '해상 침투군'으로 고용된 프랑스 외인부대원들은 그들이 묵고 있던 도하의 특급호텔을 떠나 해변으로 갔지만 타고 갈 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하마드 국왕은 100명이 넘는 음모자들을 체포했다. 또한 런던에 있지 않을 땐 프랑스 남부에 살고 있었던 부왕에게 수십억 달러를 국가에 반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1997년에 약 10억 달러를 반환했다.) 하마드 국왕은 평균 연령이 68세인 주변국 국왕들이 이단시하는 방식으로 카타르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정치·사회적 개혁을 선포해 불과 몇 년 만에 이 작은 나라를 부왕이 통치하던 시절의 카타르와는 엄청나게 다른 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 중 하나인 카타르는 페르시아 만 인접국들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보수적이며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사회다. 코란을 엄격히 따르는 와하브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있으며, 전 국민의 여가 활동으로 매사냥과 낙타 경주를 즐긴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카타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또한 비교적 젊은 국왕의 통치 아래에 있는, 아랍권에서는 가장 혁신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하마드 국왕 치하의 카타르는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며 지배 부족인 알-타니족에 의해 통치되는 군주국 체제 속에서 나고 자란 국민들에게 국왕이 직접 나서서 투표하러 나오도록 권하는 국가다. 또한 카타르는 세계 무대에도 등장했는데, 페르시아 만 지역의 주요 미군기지와 아랍세계의 CNN인 알 자지라의 본사가 있는 나라다. 이러한 변화들을 젊은층에서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마드 국왕의 개혁을 놓고 가장 불만이 많은 부류가 바로 젊은 세대다. 대다수가 서구 교육을 받았으며 공격적인 성향에 정치성이 강한 젊은 남성들은 현지 이슬람 사원에서 접하게 되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포함해 이슬람 세계의 보다 광범위한 흐름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카타르의 젊은 여성들은 젊은 남성들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국왕에게 나라를 개혁해 달라느니 정치 권력을 나누어 달라느니 여성들에게 정치권을 부여해 달라느니 하는 대중의 탄원은 전혀 없었다. 개혁은 국왕 자신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전통적 성향이 강한 어떤 한 아랍국가, 게다가 카타르같이 작지만 엄청난 부를 지닌 나라에서 국왕의 칙령에 의한 하향식(下向式) 개혁이 가능할까? 9·11 참사가 있기 전에도 나는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0년 말, 카타르는 이슬람권에서 영향력 있는 이슬람회의기구(OIC)의 의장국이 되었고, 그 이듬해인 2001년 11월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각료 회의를 성공적으로 주관했다. 카타르는 지난번 방문 때보다 훨씬 부유해진 것처럼 보였고,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천연가스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카타르의 경제를 부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결과, 하마드 국왕의 국민들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민들에 속하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연간 2만 8000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부는 일종의 혁명을 가져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유학생들이 서구의 대학들로 계속 몰려가고 있다. 다시 귀국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점점 그 수가 늘고 있는 젊은 기술관료의 일원으로 정부기관에서 일한다. 나머지는 전문직이나 관리직으로 자리를 잡는다. 또 너나할것없이 조깅이나 테니스, 골프를 시작하는 분위기다. 이는 할리파 전 국왕의 영향 때문인데, 페르시아 만의 다른 국왕들이 자신의 나라들을 무역이나 금융 중심지로 변모시키고 있을 때 그는 검정색 벤츠를 타고 도하를 돌면서 박물관과 스포츠클럽의 건설공사를 시찰했다. 그래서 지금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가리는 검은 '아바야'를 두른 젊은 여성들이 새로 산 밝은 색 러닝화를 신고 도하 만을 따라 조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타르 사회는 너무 좁아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 총인구는 60만, 카타르 국적인은 그 중 20만에도 못 미친다. 나머지 40만 명이 외국인인데, 자신들만의 주거 단지에서 생활하면서 자기네끼리만 교류하는 경향이 있다. 카타르의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은 미국인, 캐나다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에 의해 일부 운영되고 있다. 정부관리직에는 종종 팔레스타인인, 시리아인, 이집트인들이 있으며 택시기사와 식당 종업원으로 필리핀인, 인도인, 파키스탄인들이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