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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산 셀피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글 : 마크 시노트 사진 : 매튜 어빙, 레난 오즈터크

오랫동안 나는 자아도취에 빠진 아마추어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산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그곳에 가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내가 에베레스트산에서 사진을 찍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정상으로부터 120m 떨어진 지점에서 파카를 껴입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사진(포토갤러리 참조)에 찍혀 있다.

이는 지난 20년간 세계 곳곳의 산 정상을 찾아다닌 전문 등반가가 할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찍은 셀피야말로 최고의 기념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진을 찍기 위해 꽤 많은 이들이 평생 모은 돈이나 관계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등반에 도전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하산 과정에서 소중한 사진들을 사진기에만 간직한 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는 에베레스트산 등반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 산이 내가 등반을 좋아하고 이를 높게 평가하는 모든 이유와는 정반대되는 가치를 상징하는 곳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한 곳은 산이 아니었다. 그곳은 미국 뉴햄프셔주 노스콘웨이에 있는 150m 높이의 화강암 절벽이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케시드럴 레지’라고 불리는 그 절벽을 올랐다. 당시 15살이었던 우리는 고집불통이었고 전문적인 등반 기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내 침실 벽에 붙여놓은 등반가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에서 본 것 외에는 말이다. 포스터에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성이 허리에 밧줄을 묶고 있었다. 우리는 그 포스터가 등반용 벨트가 발명되기 전에 찍은 오래된 사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공구 창고에 있던 빨랫줄을 가지고 절벽으로 향했다. 우리는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힘겹게 올라 꽤 높은 곳에 있는 작은 바위에 도달했다.

우리는 높은 곳에 나란히 앉아 바람을 맞으며 워싱턴밸리산을 바라봤다. 해가 수평선을 향해 저무는 모습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고민했다. 절벽으로 떠난 첫 여행은 내게 중독성이 있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려조차 하지 않을 일을 하면서 느끼는 전율, 어디를 붙잡고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고민하다가 답을 찾아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등반을 함께한 친구와 나눈 유대감. 내가 그 후로 등반을 하며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지, 사진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등반을 시작한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에베레스트산에서 관광객을 안내하는 산업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고지대를 수없이 오른 노련한 등반가들만이 소위 ‘데스 존’이라 불리는 해발 8000m 지점 너머를 정복하기 위한 최정예 등반대에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배핀섬과 파타고니아, 카라코람산맥 같은 곳에서 실력을 갈고닦는 동안 에베레스트산 등반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때 등반가로서 달성할 수 있는 궁극적인 목표라고 여겨졌던 에베레스트산 등반은 수익성이 높은 관광업계의 주력 상품이 됐다. 이제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 산을 정복할 수 있다. 1996년 봄 등반 철에 여덟 명의 등반가들이 사망한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오히려 에베레스트산 등반 열풍이 불었다. 수년간 베이스캠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막대한 분량의 쓰레기를 남기고 갔다. 내가 등반 경험에 대해 강연을 할 때마다 누군가는 꼭 에베레스트산에 오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결같이 에베레스트산 등반에는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다.

등반계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면 에베레스트산에 대한 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났을 것이다. 내 오랜 친구인 톰 폴러드는 1999년에 조지 맬러리의 유해를 찾은 등반대의 촬영기사였다. 맬러리는 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을 시도했다가 실종된 전설적인 영국 출신의 등반가다. 맬러리와 그의 젊은 동료 대원 샌디 어빈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북동쪽 능선이었다. 정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던 두 사람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이후 등반계에서는 두 사람이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보다 약 30년이나 앞선 1924년에 에베레스트산 정복에 성공한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어빈의 유해와 그가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기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위해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등반가뿐 아니라 어쩌면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 찍은 최초의 셀피일지도 모르는 사진을 찾기 위해 취재에 나섰다.

지난해 7월 호에 썼듯이 우리 원정대는 사진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원정 덕분에 나는 에베레스트산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됐다. 티베트에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나는 첨단 장비와 산소통이 있으니 등정이 무난할 것이라고, 어쩌면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사진을 찍었을 당시 나는 어느 원정에서보다 지쳐 있었고 밀려오는 욕지기를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면서 나는 계속해서 존경심이 들었는데 그것은 트위드 소재의 옷과 징을 박은 장화 차림으로 에베레스트산을 오른 맬러리와 어빈뿐 아니라 이 경로로 자신을 내몰 결심을 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나는 등반객들을 돕기 위해 밧줄을 설치해놓은 길을 막아선 수많은 초보 등반가들과 쓰레기 더미, 네팔과 중국 정부의 부실한 관리 현황을 목격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산을 찾은 등반가들 중에는 자신밖에 모르는 관광객들이 아닌 이들도 있다는 사실도 함께 목격했다. 우리는 여러 베이스캠프에서 따뜻한 차를 수없이 나눠 마시며 등산 경로에 대한 정보와 일기 예보를 공유했고 가족 사진을 서로에게 보여줬다. 모두가 같은 목표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나는 돈을 내고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고객들은 대체로 멋진 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모은 고집 센 몽상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에베레스트산 등반가 대부분은 어린 시절 내가 케시드럴 레지에서 처음 겪었던 것과 똑같이 굉장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끈기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봄에 얼마나 많은 등반가들이 네팔과 티베트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 모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정복하기 위한 여정에 오를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곳을 찾는 이가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다시 에베레스트산을 찾아올 것이다.

나는 어빈의 유해를 찾기 위해 에베레스트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원정을 통해 발견한 것은 어쩌면 더욱 형용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어빈과 맬러리가 공유했던 정신이다. 사실 이 정신은 유서 깊은 탐험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많은 위험을 감수하며 에베레스트산을 오르고자 하는 용감무쌍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늘 살아 있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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