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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요새

글 : 엠마 리라 사진 : 호세 마누엘 나비아 삽화 : 페르난도 G. 밥티스타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300년 가까이 통치했던 전설적인 알람브라 궁전의 내부를 살펴본다.


헤수스 베르무데스는 알람브라 궁전과 인연이 깊다. 그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웅장한 언덕에 지어진 이 요새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20세기 중반에 알람브라 박물관장이 되면서 그의 가족은 이 궁전 내에 있는 사택으로 이사했다. 베르무데스에 따르면 궁전은 그의 하루하루가 펼쳐진 “무대”였다. 그런 성장 배경 덕분에 그는 일찍부터 알람브라의 전설과 역사에 빠져들었으며 이를 계기로 궁전을 보존하는 데 자신의 삶을 다 바치게 됐다. 베르무데스는 알람브라 궁전에서 40년 가까이 고고학자이자 유물 보존사로 일해왔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약 800년에 걸친 이슬람 통치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곳이 바로 알람브라 궁전이다. 베르무데스는 자신의 집처럼 익숙하게 궁전 단지 안을 돌아다니면서도 마치 그곳을 처음 보는 것처럼 경이감을 드러낸다. 그는 자주 발걸음을 멈추고 무리 지은 학생들과 경비원, 안내인, 정원사에게 인사를 건넨다.

베르무데스가 공식 안내서를 쓴 사람이기는 하지만 비공개 장소를 소개하는 데 완벽한 안내인이다. 우리는 알람브라 궁전의 입구 네 곳 중 가장 큰 ‘정의의 문’에서 시작해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중정과 탑들은 물론이고 소수에게만 접근이 허락되는 내밀한 곳과 사실 및 신화가 얽혀 있는 장소까지 살펴본다. 연구원들이 계속해서 알람브라 궁전을 연구하고 있지만 이 궁전은 여전히 고고학 연구와 복원 작업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약 20년 만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예술 작품 중 하나가 복원됐다.

“알람브라는 무엇보다도 궁전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왕이 거주했으며 군 막사와 세련된 도시, 250년에 걸쳐 지어진 궁전 단지가 자리해 있었죠.” 베르무데스는 말한다. 알람브라 궁전은 무함마드 1세가 1238년부터 건설한 최초의 요새 알카사바에서 출발해 나스르 왕조의 호화스러운 양식을 반영한 후기 궁전으로 변모했다. 나스르 왕조의 술탄들은 1492년까지 이 궁전 도시를 다스렸다. 그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권력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이곳이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드가 결혼한 이후 새로 통일된 스페인 왕국에 정복 됐기 때문이다.

나스르 왕조는 254년 동안 그라나다 토후국을 통치했다. 이 토후국의 세력권은 그라나다 도시 자체보다 더 넓은 곳까지 뻗어 있었다. 오늘날 안달루시아 지역에 속하는 이 일대는 당시 “목가적인 환경에 고립된 채 봉건 사회를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었다”고 베르무데스는 설명한다. 하지만 이 왕국의 유산은 이슬람 통치 지역으로 알려진 알 안달루스에서 탄생한 아름다움과 건축학적 세련미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기념물에 남아 있다.

그라나다가 함락된 이후 가톨릭 총독들이 알람브라 궁전을 계속 관리했으나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을 점령했다. 그들은 철수하면서 이곳을 심하게 훼손했다. 결국 스페인 왕실은 궁전을 국가에 이양했고 이곳은 1870년에 국가 기념물로 지정됐다. 오늘날 이 궁전 도시는 활기를 되찾고 있다. 궁정 직원들이 이곳을 관리하며 관료 체제가 유지되고 있으며 엄격한 출입 절차도 시행되고 있다.



스페인에 파견된 가장 유명한 사절에 해당하는 한 사람이 이곳을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작가 워싱턴 어빙이다.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미국 대사관에 파견된 외교관 신분으로 1829년 그라나다를 방문했다. 당시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철수한 지 17년 후로 남은 건물들은 방치된 채 황폐해져 있었다. 방은 약탈당했고 연못은 빨래터로, 중정은 가축우리로 바뀌었으며 오갈 데 없는 일가가 빈 공간에 눌러앉았다. “왕들이 살던 궁전이 부랑자촌이 돼버렸지만 항상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알람브라 궁전이 건재할 수 있었죠.” 베르무데스는 말한다. 그는 그들을 알람브라 궁전의 “무단 거주자들”이라고 부른다.

어빙은 그들에게 ‘알람브라 궁전의 아이들’이라는 좀 더 시적인 표현을 붙였다. 망국의 유령들과 함께 <알람브라 궁전의 이야기>에 등장해 도시를 알리고 관광객의 관심을 끈 것은 부랑자와 도적, 소외된 자들이었다. 그라나다의 모든 서점에 여전히 비치돼 있고 널리 번역된 이 책은 <천일야화>를 연상시키며 알람브라 궁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고착시켰다. 다른 유명인들도 그라나다에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 누구도 어빙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빙이 미친 영향력의 정도를 감안하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향하는 역사적인 길 쿠에스타 데 고메레스 근처에 홀로 세워진 그의 동상은 기념물치고는 미약해 보인다.

어빙이 여행에 동행한 한 러시아 외교관과 함께 알람브라 궁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이곳의 방문객들, 심지어 고위 인사들까지도 벽에 자신들의 이름과 짧은 글을 끄적여 놓은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러시아 외교관은 이런 관행을 막으려고 가죽으로 제본된 방명록을 제공했다.

어빙과 동행한 외교관은 곧 떠났지만 어빙은 “넋을 잃게 만드는 이 오래된 궁전에 매혹된 상태로” 몇 달을 더 머물렀다고 썼다. 그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린다라하 중정이 내려다보이는 궁전 침실을 숙소로 삼았다.

어빙이 사색하며 기록을 남긴 장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방문할 수 있다. 재건된 ‘7층 탑의 문’이 그중 하나다. 유명한 전설에 따르면 마지막 술탄 보아브딜이 이 문으로 탈출하면서 자신이 떠난 후 이를 봉인해달라고 간청했다. 어빙의 이야기에서 이름을 딴 또 다른 장소인 ‘공주들의 탑’은 기독교인 포로들과 사랑에 빠진 세 명의 무슬림 공주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다.

어빙의 책은 알람브라 궁전을 “반드시 방문하고 탐험해야 할 갈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베르무데스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람브라 궁전을 우리 유산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어요. 알람브라 궁전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은 모든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는 말한다.
 
개인 공간들은 아름다운 야외 전망을 갖추고 있다. 방어용으로 지어졌던 ‘포로의 탑(왼쪽)’은 작은 궁전으로 변모했다. 이 탑의 이름은 그곳에 포로로 잡혀 있던 술탄의 연인 때문에 붙여졌다. 탑의 벽들에는 탑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아랍어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궁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다. 기독교 통치자들은 방들을 만들면서 자신들만의 특징을 남겼다. 그들은 벽으로 정원을 둘러싸 회랑과 같은 린다라하 중정을 만들었다.
알람브라 궁전은 항상 외지인들을 매료시켰다. 1492년 1월, 군사 행렬을 이끄는 이사벨라 여왕은 말을 타고 쿠에스타 데 고메레스를 올라 알 함라로 향하는 승리의 행진을 시작했다. 알 함라는 “붉은색”을 뜻하는 아랍어로 알람브라 궁전의 분홍색 돌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700년 넘게 이어진 레콩키스타(국토 수복 운동)를 통해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영토는 조금씩 회복돼갔다. 교황령으로 이 최후의 십자군 전쟁이 승인된 후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10년에 걸쳐 전쟁이 벌어졌다.

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군대가 마침내 알람브라 궁전을 차지했을 때 이사벨라 여왕은 오랫동안 접근이 금지됐던 성채 내부에서 정교한 격자 세공과 벌집무늬로 장식된 아치형 천장,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들, 웅장한 전면부가 비치는 연못 등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알람브라 궁전은 300년 가까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누군가는 기독교 여왕이 알라를 찬양하는 새김글들을 벽에서 없애버리고 궁전을 잿더미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왕은 궁전을 그대로 두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이곳을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여왕이 1504년 메디나 델 캄포 마을에 있는 자신의 궁에서 죽었을 당시 그녀의 관은 3주에 걸쳐 그라나다로 운구됐다. 불과 12년 전에 나스르 왕조가 퇴거한 알람브라 궁전은 가톨릭 신자인 이 여왕의 영원한 안식처가 됐다. 처음에 여왕의 시신은 궁전에 안치됐으나 후일 남편 페르디난드 왕의 유해와 함께 그라나다 왕립 예배당으로 이장됐다.

몇 년 후 이사벨라 여왕의 손자 카를 5세는 신혼여행 중에 조부모가 정복한 도시 그라나다를 방문했다. 이곳의 상징적 가치를 알아본 그는 알람브라 궁전 내에 자신의 궁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가 100년이 넘게 걸린 탓에 카를 5세가 그곳에 산 적은 없었지만 베르무데스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궁 건설에는 새로운 서사가 더해졌다. 카를 5세는 승리를 상징하는 의미로 원래의 건축물을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건축물을 지었다. 그렇게 카를 5세는 “자신의 지위를 조금 더 높이 올려놓았다”고 베르무데스는 말한다. 한 건축가는 스페인 왕을 위해 지어진 이 견고한 정사각형의 건축물을 외관상 기존 건축물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의미로 “유성”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건축물은 방문객들에게 단연코 가장 높이 평가받는 나스르 궁전(메수아르 궁과 코마레스 궁, 사자의 궁으로 이뤄져 있음)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베르무데스는 카를 5세 궁전의 중앙 회랑 안에서 팔뚝만 한 열쇠를 꺼내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을 연다. 알람브라 궁전의 직원들은 이 계단을 “시간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둑어둑한 상태에서 다른 문으로 내려간다. 베르무데스가 또 다른 열쇠로 문을 열자 마치 마법처럼 나는 한순간에 ‘미르투스의 중정’에 서 있다. 미르투스의 중정은 코마레스 궁의 직사각형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미르투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당연히 카를 5세 궁전보다는 지대가 조금 낮다.

순식간에 르네상스 시대의 절제된 분위기가 우리의 감각을 압도하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승자의 궁에서 패자의 궁으로 이동한 것이다. 1580년에 축조된 이 계단의 목적은 바로 옛 왕궁과 새로운 왕궁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관광객들은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마치 과거의 유령을 만난 것처럼 쳐다본다. 베르무데스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방금 우리가 나온 문을 닫는다.
 
고고학자 헤수스 베르무데스가 아주 오래된 벽에 조명을 비추고 있다. 그는 “알람브라 궁전 건설의 위대한 두 시대는 생명의 원천인 물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언덕배기에 있는 요새인 알람브라 궁전에는 정교한 급수 체계가 필요했다. 우물(가운데) 천장에 매달린 양동이로 물을 긷는 이 저수조는 도시 최초의 기독교 총독이 통치하던 1494년에 건설됐다. 이를 통해 이슬람 왕조 시기에 시작된 수자원에 대해 접근이 더욱 용이해졌다.
해마다 약 200만 명의 관광객이 알람브라 궁전을 찾지만 이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전체의 약 20%에 국한돼 있다. 베르무데스는 소위 지하 통로라고 하는 알람브라 궁전의 숨겨진 공간으로 나를 안내한다. 간소하고 기능적인 이런 공간들은 당시처럼 눈에 띄지 않게 숨겨져 있었으며 궁전 관리를 담당하는 하인과 경비병의 영역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간 중 일부에는 죄수를 가두기도 했다. 우리는 알람브라 궁전 단지의 지하 감옥 20곳 중 하나를 들여다본다. 불과 100년 전에 발견된 감옥이었다. 그라나다가 함락된 이후 이사벨라 여왕은 이슬람의 거점 말라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인 포로들을 즉시 풀어줬다. 당시 말라가에서는 한 네덜란드 출신의 장교가 자신이 40년 넘게 억류돼 있었다고 여왕에 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지하 통로를 통해 대형 수조로 걸음을 옮긴다. 수조는 원통 모양의 아치형 천장과 엄청난 규모로 인해 더욱 대성당처럼 보인다. 이런 지하 구조물은 사시사철 시원하게 유지되는 덕분에 곡물과 각종 식료품을 보관하기에 적합하다. 사다리를 타고 동굴 같은 저장고로 내려가자 바로 이곳에서부터 알람브라 궁전의 전설적인 통로가 시작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층 위에는 왕실 근위병들이 코마레스 탑의 왕좌실 아래에 배치돼 비상시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왕좌실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관람객들이 자신들의 발밑에 있는 복잡한 구조물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하 통로를 걸어간다.

베르무데스가 문을 연다. 손전등을 비추자 땅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나고 200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또 다른 문이 나온다. 문은 성벽 바로 바깥쪽에 있는 숲의 한복판으로 통한다. 우리가 있는 곳은 다로강과 가깝다. 이 통로를 통해 궁전을 쉽고 은밀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1359년, 나스르 왕조의 8대 군주 무함마드 5세는 반란으로 축출되고 그의 이복동생이 왕위에 올랐다. 반란군은 한밤중에 성벽을 기어올라가 경비병들을 칼로 공격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겨우 스무 살이었던 적통 술탄은 코마레스 탑의 통로를 통해 탈출했다.

기독교 동맹국인 카스티야 왕국의 페드로 1세가 무함마드 5세를 배신하는 등 반란은 권력 싸움의 성격을 띠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무함마드 5세는 왕좌를 되찾았다. 그 후 30년에 걸쳐 번영과 평화를 이룬 그의 통치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함마드 5세는 왕조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알람브라 궁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로 손꼽는 곳을 건축했 다. 바로 중앙에 12개의 사자상으로 둘러싸인 분수대가 있는 중정이다. 그리고 그는 궁전을 다른 예술 양식으로 장식하는 부친의 전통을 이어갔다. 바로 아랍어 새김글이었다.
 
‘제왕의 방’에는 최근 복원된 14세기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그라나다의 술탄이나 법관들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청금석과 적철석, 진사, 금 등에서 추출한 선명한 안료를 사용해 그려졌다. 그림에 나타나는 고딕풍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알람브라 궁전의 벽 새김글들을 해독한 <알람브라 읽기>의 저자 호세 미구엘 푸에르타 빌체스는 알람브라가 시의 궁전, 즉 ‘문자로 이뤄진 건축물’이라고 말한다. 빌체스도 베르무데스와 마찬가지로 이 궁전을 연구하고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지지대와 기둥, 회랑들이 사라진다면 알람브라 궁전은 문자로만 떠받쳐질 것”이라고 궁전 곳곳에 있는 새김글들을 언급하며 말한다. 구절은 벽을 따라 새겨져 있고 소용돌이 무늬로 장식돼 있으며 심지어 벽장 안쪽까지 이어져 있다. 어떤 구절은 석고에, 또 다른 구절은 나무 또는 타일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나스르 왕조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신조 “신 외에 정복자는 없다”라는 문구가 방문객에게 전하는 아랍어 인사말 ‘바라카(축복)’와 ‘아피야 바키야(영원한 건강)’, ‘윰(행운)’과 함께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사실 알람브라 궁전은 신과 그 신의 지상 대리자인 술탄을 찬양할 목적으로 설계됐다. 장식용 문자가 방문객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거대한 책 속에 들어온 느낌을 풍긴다. 그러나 기록된 문자의 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신 및 기록을 관장하는 집무실 ‘디완 알 인사’가 1273년경에 만들어졌고 외교와 작문에 모두 능한 사람이 이곳을 관리했다. “이 사람의 역할은 선전 활동이었죠. 글은 정확하고 아름다우며 시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신과 왕조, 술탄을 찬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푸에르타 빌체스는 말한다. ‘카티브’라고 불리며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갖춘 이 인물은 총리까지 겸하게 되면서 술탄 다음으로 왕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자가 됐다.

푸에르타 빌체스는 마치 자신이 왕국의 저명한 시인들과 함께 시를 짓거나 격동의 시대를 연대별로 기록하는 귀한 내부 문서를 필사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이는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지리적 고립과 왕국의 필연적인 몰락을 인식한 왕조 최후의 노래다. 알람브라 궁전의 새김글들은 나스르 왕조가 이슬람 예술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에 속한다. 어쩌면 이는 오래가지 못할 위엄을 과시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새김글에 사용된 두 가지 아랍어 서체 가운데 초서체, 즉 나스키체는 쉽게 눈에 띄지만 쿠픽체는 아랍어를 아는 방문객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선형 형태인 쿠픽체는 장식과 조화를 이뤄 기하학적 무늬로 보이기도 한다.

사자의 궁에서는 시인 이븐 잠라크와 무함마드가 가장 대담한 합작을 했을지도 모른다. 돌 표면의 결이 사자의 근육을 닮도록 정교하게 조각된 분수대에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분수대에는 술탄의 권위를 뛰어넘는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 “칼리프”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칭호 변경은 정치가였던 무함마드에게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 “당시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술탄은 자신의 권력을 기독교 세력이 아닌 자기 백성에게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죠.” 푸에르타 빌체스는 말한다.
 
코마레스 궁의 왕좌실 내부는 이슬람 디자인의 특징인 기하학적 무늬의 타일과 본래 화려한 색으로 칠해졌던 정교한 벽토 세공 및 새김글로 장식돼 있다. 글귀는 장식적인 아랍어 서체인 쿠픽체로 벌집 모양의 아치형 구조물에 새겨져 있으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위쪽에 읽을 수 있게 돼 있는 초서체 띠(사진 옆의 벽까지 세로로 이어짐)는 왕좌실을 찬미한다. “궁전 중앙의 왕좌실은 심장과 같도다.” 왕좌실은 시에서 이렇게 의인화돼 있다.
사자의 궁에 있는 ‘제왕의 방’에도 20년에 걸친 복원 노력 끝에 이제 막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희귀한 예술품이 소장돼 있다. 세 점의 그림에는 이슬람 예술에서는 이례적이게도 인물이 그려져 있다. 특이한 점은 그뿐이 아니다. 중앙 돔에는 화려한 무슬림 복장을 한 10명의 남성이 이 공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설에 따르면 이들은 나스르 왕조의 초기 통치자 10명을 상징하며 이 방의 이름도 그에 따라 붙여졌다. 다른 두 점의 그림에는 기독교와 무슬림 기사들이 사냥 및 마상 시합을 벌이고 처녀들을 구출하는 중세의 궁정 모습이 묘사돼 있다. “제왕의 방에서 적어도 두 번의 왕실 혼례가 거행됐습니다. 이 그림들은 나스르 궁전의 웅장함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의도로 그려졌죠.” 푸에르타 빌체스는 말한다. 14세기에 제작된 이 작품들은 이 방이 16세기 교회에 통합되면서 결국 숨겨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작품의 상태도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화폭은 명반으로 무두질한 말가죽을 천연 템페라 안료로 장식한 다음 뒤집힌 배 선체 모양의 나무틀에 표구했고 타르와 석고를 발라 물 및 화재로 인한 손상을 방지했다. “목공과 도장, 가죽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이 힘을 합쳐 스페인 이슬람 세계에서는 전례 없는 기법을 사용해 걸작을 만들어냈죠.” 알람브라 궁전에서 복원 부서를 이끌고 있는 엘레나 코레아는 말한다.

600년 전 이 주옥같은 작품을 제작한 협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건축가와 도장공, 목수, 화가들이 힘을 합쳐 제왕의 방을 수리했다. 이들의 한 가지 성과는 관람객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복원용 모르타르를 개발한 것이었다. 그 비밀 성분은 퀴닌이다. “복원한 부분은 자외선을 비춰야 드러나죠.” 치장 벽토 및 타일 복원 공방을 운영하는 라몬 루비오는 말한다. 아이디어는 뜻하지 않은 순간에 떠올랐다. 디스코텍 조명 아래에 있던 진토닉 음료에서 퀴닌 성분이 형광색으로 빛나는 모습을 봤을 때였다.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전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공존했던 마지막 흔적을 보여주는 이런 그림들은 과연 누가 그렸을까? 복원 과정에서 수행된 고된 연구에도 불구하고 알람브라 궁전 내 다른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제왕의 방에도 풀리지 않은 비밀들이 남아 있다.
 
대형 저장고는 곡물 저장 시설이자 지하 감옥으로도 사용됐다. 이 저장고는 궁전 단지에서 발견된 20개의 지하 감옥 중 하나다. 포로들은 밧줄에 묶여 구덩이 속으로 내려졌고 그곳에서 몸값이 지불되거나 포로 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 지하 감옥에는 술탄의 궁정 신하들이 갇히기도 했으나 스페인 통일 왕국이 이슬람 왕국의 영토를 점차 차지하면서 기독교인 포로가 더 늘어났다.
나는 그라나다의 미로 같은 중세 지구인 알바이신을 건너다본다. 알바이신은 알람브라 궁전 맞은편 언덕에 지어졌다. 전면부가 하얗게 칠해진 주택과 사이프러스가 울창한 숨겨진 정원이 있어 더없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나는 나스르 왕조의 제24대 마지막 술탄 보아브딜이 이 궁전을 영원히 떠날 때처럼 쿠에스타 델 레이 치코(레이 치코는 ‘소년 왕’이라는 뜻으로 보아브딜의 애칭임)라는 길을 따라 알바이신으로 내려간다. 나는 그 과거의 세계로 건너가면서 당시 보아브딜의 백성들처럼 알람브라 궁전을 본다. 알바이신에서 본 알람브라의 궁전들은 마치 아랍어를 읽는 것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연대순으로 배치돼 있다. 찻집이 즐비하고 전통 시장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알바이신에서는 아랍어가 여전히 사용된다. 보아브딜이 축출된 후 백성들은 생업과 집, 언어 및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 평화로운 공존의 시기는 고작 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무슬림은 1501년 무렵부터 강제 이주하거나 기독교로 개종해야 했다.

나는 다르 알 오라 궁전을 들여다본다. 이 궁전은 보아브딜의 모친이 살던 곳이자 그가 모로코로 도피하기 전 그라나다에서 머문 마지막 피난처였다. 알람브라 궁전과 마찬가지로 외관상으로는 드러나는 것이 거의 없다. 궁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내부에 존재한다.
 
예술품 복원 전문가 10여 명과 40명의 정원사를 비롯한 약 500명의 사람들이 궁전을 관리한다. 사진에 보이는 관리인들은 헤네랄리페에 있는 회랑을 담당한다. 헤네랄리페라는 이름은 ‘건축가의 정원’을 뜻하는 아랍어 잔나트 알 아리프에서 유래했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더 위쪽에 위치한 이 궁전은 술탄 가족을 위한 전용 휴양지로 사용됐다. JUAN MANUEL CASTRO PRIETO, AGENCE VU/REDUX
그라나다 방문

방문객들은 그라나다의 풍부한 문화유산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1. 알람브라 궁전
적어도 한두 달 전에는 입장권을 예매해야 한다. 일반 입장권으로는 알카사바, 나스르 궁전, 파르탈, 헤네랄리페에 들어갈 수 있다. 관람은 대개 야외에서 이뤄지므로 봄과 가을이 최적의 시기다. 사자상 분수대가 있는 사자의 중정과 미르투스의 중정은 꼭 둘러봐야 할 곳이다. 미르투스의 중정에는 궁전 전면부가 비치는 연못이 있다. 두 개의 박물관이 있는 카를 5세 궁전은 입장권 없이 방문할 수 있다.

2.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
원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이 안치된 곳이었으나 지금은 호텔과 식당으로 탈바꿈해 나스르 궁중 요리법을 기반으로 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3. 알바이신
구불구불한 돌길이 뻗어 있는 이 구시가지는 한때 그라나다의 이슬람 생활권이었다. 나스르 왕조 시대에 지어진 주택들은 중소 호텔로 바뀌었다. 특히 추천하는 호텔은 15세기에 지어진 ‘호텔 카사 모리스카’다. 알바이신의 가파른 돌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다면 도심에 위치한 호텔 팔라시오 데 로스 파토스가 대안일 수 있다. 이곳은 19세기 대부호의 저택이었다. 카르멘 데 아벤 우메야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은 알람브라 궁전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식당은 전통적인 카르멘 주택의 특징인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내에 있다. 산 니콜라스 전망대와 인근의 모스크 정원은 알람브라 궁전 너머로 지는 해를 감상하기에 제격인 장소다. 칼데레리아 누에바 거리에서 차를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내기를 추천한다.

4. 사크로몬테
인근 지역인 사크로몬테는 플라멩코의 발상지다. 플라멩코는 이곳에 500년 이상 거주해온 로마니 공동체에서 유래한 춤이다. 많은 사람이 이 지역 특유의 동굴에 살고 있는데 이 동굴은 그라나다가 함락된 후 이슬람교도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다. 이들이 플라멩코의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동굴 내에 있는 술집에서는 쿠에바 데 라 로시오를 비롯한 플라멩코 공연이 열린다. 강을 따라 ‘엘 파세오 데 로스 트리스테스’와 ‘라 카레라 델 다로’를 지나 인근 지역까지 아름다운 산책로가 이어진다. —엠마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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