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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낙원 보호하기

글 : 제이미 슈리브 사진 : 찰리 해밀턴 제임스

코스타리카의 오사반도는 자연 보존의 모범 사례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곳의 경이로운 자연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셀레도니아 텔레스는 자신이 몇 년도에 오사반도로 이주해왔는지 혹은 자신이 그때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왜 왔는지는 또렷이 기억한다. 바로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땅 때문이었다. 코스타리카의 남태평양 연안에 갈고리 모양으로 형성된 1800km² 면적의 오사반도는 그 당시 변두리에 있는 외딴 숲이었다. 그곳은 헤치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맹그로브가 빽빽하게 자란 좁다란 구역을 사이에 두고 본토와 떨어져 있었고 작은 배가 아니면 좀처럼 들어가기 어려웠다. 셀레도니아가 다섯 명의 자녀와 닭 여섯 마리, 개 한 마리와 함께 700콜론(약 1달러)을 들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함께 온 남자친구가 “자연을 싫어하며 벌레만 보면 달아나곤 했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그녀는 도끼를 집어 들고 직접 땅을 개간했다.

“나무를 베면서 나무가 그만큼 자라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생각하고는 단박에 나무를 베어버렸죠. 그게 우리가 한 일이에요. 우리는 살기 위해 숲을 베었죠.” 그녀는 말한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셀레도니아 부인이라고 불리게 된 그녀는 라팔마라는 도시에 있는 그 지역에 여전히 살고 있다. 2019년 6월의 어느 날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내게 자신의 정원과 집을 구경시켜줬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걸음걸이 때문에 나는 그녀가 앞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없었다.

셀레도니아 부인에게 그날은 속죄의 날이었다. 숲을 베는 대신 그녀는 숲을 조금씩 복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제안으로 비영리 단체 ‘오사 컨서베이션’이 지역 단체와 정부 기관들과 협력해 그녀가 소유한 9ha 면적의 농장에 토종 묘목 1700그루를 심었다. 해마다 코스타리카의 식목일이면 그녀의 자녀 여섯 명과 손주 16명, 증손주 14명 중 여럿이 모여 주변 마을 사람들과 식목일을 기념했다. 전시회를 비롯해 연설, 게임 등이 진행됐고 밝은색 전통 의상을 입은 아이들이 춤을 췄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셀레도니아 부인이 의미 깊은 마지막 나무를 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느릿느릿 시냇가로 걸어 나왔다. 셀레도니아의 손자 파블로가 구덩이를 팠고 셀레도니아 부인은 둥그런 뿌리를 땅속에 파묻었다.

“어쩌면 내 농장 전체를 다시 숲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녀가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식물학자 루스메리 필코 우아르카야는 오사반도의 얼마 남지 않은 노숙림에서 야생 육두구 씨앗을 모은다. 그녀와 동료들은 씨앗이 묘목으로 자라면 묘목이 거미원숭이나 씨앗을 퍼뜨리는 다른 동물들을 끌어들일 것이라 기대하며 이를 훼손된 산림에 심을 계획이다. “우리가 심는 나무는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동물들이 심는 나무는 숲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거예요.” 우아르카야는 말한다.
오사반도는 어느 한 곳 가릴 것 없이 지구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 속한다. 비록 지표면의 0.001%도 채 안되는 면적이지만 오사반도에는 지구 생명체의 2.5%가 살고 있다. 운무림, 저지대 우림, 늪지, 맹그로브, 민물, 연안석호 등 오사반도에 있는 다채로운 서식지는 활기가 넘치는 금강앵무와 거미원숭이뿐 아니라 자취를 감췄거나 대대로 터를 잡고 살던 곳들 대부분에서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는 수천 종의 생물들에게 피난처가 되고 있다. 야생 고양이 다섯 종이 오사반도의 숲을 누비고 다니며 바다거북 네 종은 알을 낳기 위해 이 반도의 태평양 해안으로 느릿느릿 올라온다. 동쪽으로는 귀상어와 혹등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골포만 협만으로 헤엄쳐 온다.

그러나 오사반도의 생태계는 위태로운 상태다. 그곳의 생태계는 과거에 두 번이나 궤멸 직전까지 갔었는데 그 주된 원인은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노린 기업들 때문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숲을 베어내거나 오사반도의 강물을 일어 몇 달러어치 금을 얻으려는 보통 사람들의 작은 행동 때문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오사반도의 일부 지역사회는 한때 자신들이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자연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섰다. 목재를 얻기 위해 고목을 자르던 사람들이 이제 생태관광객들을 위해 길을 내고 불법으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대신 밀렵꾼을 뒤쫓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지역은 새로운 위협에 직면해 있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코스타리카 경제가 무너지는 바람에 관광업을 통해 유입되던 자금이 끊겨버렸다. 관광업에서 나오는 수익은 그동안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생활 방식으로 전환해가는 과정을 지원해왔다. 오사반도 주민들의 마음과 생각은 이곳을 보존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이곳 사람들은 자연과 친밀해요. 하지만 식솔을 건사할지, 자연을 보존할지를 놓고 택하라면 가족이 우선일 거예요.” 셀레도니아 부인의 농장에 산림을 복원시키는 사업을 이끈 오사 컨서베이션의 관계자 힐러리 브룸버그는 말한다.
 
금강앵무 한 쌍이 코스타리카의 오사반도에 있는 브라질고사리나무에서 활기차게 놀고 있다. 이 종은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터전으로 삼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반려동물로 거래되는 탓에 멸종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오사반도에 사는 개체군은 번성하고 있다. 이는 보존 활동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이다.
DAVID PATTYN
NPL/MINDEN PICTURES
오사 컨서베이션의 이사 앤디 위트워스(37)는 페루의 아마존 우림에서 6년간 자연 보존을 위해 투쟁하다 낙심한 뒤 2017년에 이 단체에 합류했다.

“오사반도에 왔을 때 갑자기 다시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어요. 아마존 우림에서는 1년에 한두 번꼴로 거미원숭이를 보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하루에 한두번 녀석을 보죠.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오사반도 남서쪽에 자리 잡은 오사 컨서베이션 생물학연구소에서 위트워스가 아침 식사를 하며 말했다.

위트워스는 오사반도의 보존 작업이 성공한 것은 어느 정도 코스타리카 정부의 선구적인 재조림 정책 덕분이라고 서슴없이 공을 돌렸다. 한때 코스타리카 국토의 75%를 뒤덮었던 숲은 20세기 후반 50년 동안 거의 내내 목재를 얻으려는 이들과 소를 사육하려는 이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작물을 재배하려는 이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잘려 나갔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나무로 뒤덮인 땅이 전체 면적의 5분의 1을 겨우 차지할 정도로 줄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에 코스타리카 정부는 이런 추세를 단순히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뒤집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구체적인 관리 계획 없이 나무를 베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토지 소유주에게 보조금을 지원해 수목으로 뒤덮인 지역을 그대로 보존하고 새로 나무를 심게 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보조금은 휘발유에 매기는 국세에서 충당했다. 불과 25년 만에 코스타리카의 산림 면적은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코스타리카는 2030년까지 국토의 60%를 나무로 뒤덮는다는 목표를 향해 순항하고 있다.

위트워스에 따르면 전력회사가 나무 한 그루를 벨 경우 다섯 그루를 심을 자금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노력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다고 그는 덧붙인다.

“산림 면적을 늘리는 일만 추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중엔 텅 빈 숲만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생태계 전체를 복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오사 컨서베이션이 지역 단체와 협업해 숲 곳곳에 설치한 관찰카메라들은 숲이 얼마나 잘 채워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위트워스에 따르면 1990년대에 진행된 한 연구에서는 반도의 서부 지역을 대부분 차지하는 코르코바도 국립공원 너머에서 사실상 어떤 야생동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야생동물들이 사냥꾼들에 쫓겨 종적을 감췄던 곳에서 녀석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때 공원에서 보기 드물었고 공원을 벗어나면 아예 볼 수 없었던 퓨마도 다시 개체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오실롯의 개체수도 쭉쭉 늘고 있으며 또 다른 작은 고양잇과 동물인 재규어런디도 마찬가지다. 만 끄트머리에 있는 피에드라스블랑카스 국립공원에는 돼지를 닮은 포유동물 목도리페커리가 대거 살고 있다. 목도리페커리의 친척뻘인 흰입페커리는 아직 코르코바도 공원 밖으로 영역을 넓히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뜻밖의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녀석의 고기를 노리는 이들이 많은 데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습성상 녀석들은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흰입페커리는 재규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기도 한데 재규어 또한 공원 경계 너머에서까지 개체수를 늘리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결국 오사반도 생태계의 건강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태계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오사 컨서베이션은 셀레도니아 부인의 농장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개인 소유의 농장에 나무를 심으며 숲을 채우는 작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경작지에 있는 강과 개울을 따라 나무를 심으면 농가 가축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토양 침식을 막는 데 도움을 주며 새들이나 다른 야생동물에게 보금자리가 생겨난다. 하지만 장기적인 목표는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에서 피에드라스블랑카스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최종적으로는 코스타리카와 파나마에 걸쳐 있는 탈라만카산맥 일대에 자리 잡은 라아미스타드 국제공원까지 쭉 이어지는 녹색 회랑 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정부가 내놓는 친환경 정책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농부나 목장주를 한 명씩 상대하며 현장에서 땅을 매입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위트워스는 “국가 차원의 전략 덕분에 숲에 이런 엄청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생동물들을 불러들이는 일은 현지인들이 취하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오사반도에 다양한 종의 생물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금을 캐러 온 광부들과 불법 거주자, 도피자 등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무법자처럼 행동한다고 널리 알려지면서 일반 사람들은 이곳으로 오는 것을 꺼렸다.

그 당시 오사반도의 80%는 여전히 노숙림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에 중앙아메리카를 관통하는 인터아메리칸 고속도로가 완공되자 인구가 두 배로 늘어 약 6000명에 육박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새로 유입된 사람들은 주로 오사반도 동부를 따라 기다랗게 조성된 경작지에 정착했다. 대부분의 미개발 토지는 다국적 목재 회사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권리를 행사하기에는 관리가 부실했던 탓에 누구라도 땅을 개간할 수만 있으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한편 반도에 있는 생물학연구소도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바로 타국의 과학자들로 1960년대에만 10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반도 서부에 있는 비옥한 코르코바도 분지로 이주민들이 몰려들자 과학자들은 이 분지를 보호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지 않으면 오사반도의 숲과 숲이 품은 생물다양성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자국 내 공원 체계를 처음 마련한 알바로 우갈데를 필두로 목재 회사와 어렵사리 토지 교환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고 그 결과 1975년에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이 조성됐다.

남은 문제는 공원 언저리에 자리 잡은 정착민 250여 명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목재 회사와 공원 경비원, 과학자들을 똑같이 적대시했다. 이들 대부분은 산림 벌채와 경작, 건설 등 토지 ‘개선’을 위한 보상금으로 총 100만 달러 이상을 지급받은 후 결국 그들을 위해 동부에 마련한 토지로 이주하는 데 합의했다.

몇 년간은 공원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금을 캐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최소한 입에 풀칠을 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오사반도는 두 번째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1980년대 초 무렵이 되자 공원에서 불법으로 금을 캐는 광부가 약 1400명에 달했다.

“피해가 컸죠.” 코스타리카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환경보호론자로 1985년 광부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영입된 댄 젠슨은 말한다. 공원 남쪽의 3분의 1에 달하는 지역에서 대부분의 동물이 광부들의 식량감으로 사냥을 당했다.

젠슨은 ‘총과 금배지’라고 부르는 방법을 동원해 광부들을 쫓아내기보다는 1년 동안 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이 스스로 떠나도록 설득해본 다음 안 되면 체포하는 방법을 권했다. 이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 후로 몇 년 동안 정부가 종종 더 물리적인 접근법을 다시 동원하자 지역 주민들의 원성만 더 높아졌다.

반도 중심과 인접한 란초쿠에마도만큼 총과 금배지를 동원한 접근 방법이 어설프게 적용된 곳은 없었다. 이곳은 1960년대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우레냐 가족이 숲을 개간해 만든 정착지다. 반도에 사는 여느 주민들처럼 이곳 사람들도 농작물을 기르고 야생동물을 사냥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한 해 걸러 한 번씩 흰입페커리 떼가 공원에서 란초쿠에마도로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마을에 사는 사냥꾼들은 녀석들의 약 80%를 죽였다. 그런데 2008년에 흰입페커리 떼가 경비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일부 경비원은 무장을 한 상태였다. 마을 주민들은 경호원의 보호 아래 겁이 없어진 흰입페커리 떼가 자신들의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존 활동은 단기적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해 마을 사람들이 죽인 페커리는 다섯 마리에 그쳤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공원 당국과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퓨마 한 마리가 사진기의 셔터 소리에 경계심이 발동한 듯 관찰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환경보호단체와 친환경 숙박시설, 지역 주민들이 이곳저곳에 설치해놓은 이런 관찰카메라들을 통해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오사반도에서 퓨마뿐 아니라 다른 야생 고양잇과 동물 세 종의 개체수가 반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규어는 여전히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11년 후 내가 란초쿠에마도를 다시 방문했을 때 이 마을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나는 오사 컨서베이션의 지역사회 지원 담당자 마르코 이달고와 함께 다녔다. 우레냐 가문의 제일 큰 어른의 조카 엔리케 우레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철이 되면 마을을 지나 이동하는 페커리들이 다시 화젯거리였다. 다만 이번에는 녀석들을 어떻게 보호하느냐가 화두였다.

란초쿠에마도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은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필요에 따른 것이었지만 변화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교육이었다. 2002년 우레냐는 14~60살 사이의 마을 주민 14명과 함께 산림생물학 집중 강좌를 들었다. 이 수강생들은 무엇보다도 페커리가 ‘생태계 공학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페커리는 씨를 흩뜨리며 녀석들이 진흙에서 뒹굴어 움푹 팬 곳은 수생생물의 서식지가 된다. 또한 녀석들이 흔한 식물의 씨앗을 먹어 치우는 덕에 다양하고 더 희귀한 식물들이 경쟁의 기회를 얻게 되면서 숲의 구조가 바뀐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 생물다양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민들은 생태관광 전문 업체를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이제 마을에서는 페커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새의 개체수를 집계하며 관찰카메라를 관리하고 나무 씨앗을 모으며 아이들에게 숲 걷기 및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달고는 주민들의 심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줬지만 공치사를 늘어놓지 않는다.

“주민들이 도구를 집어 들고 스스로 변한 것이죠.” 그는 말했다.

나는 토마스 무뇨즈와 이틀을 함께 보냈다. 그가 자란 도스브라조스 역시 불법 채굴에 의존하다 살아남기 위해 생태관광으로 눈을 돌린 또 하나의 마을이다. 무뇨즈는 10살의 나이에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가 2년 뒤에는 금을 캐기 시작했다.

그는 경비원과 경찰을 피하는 것을 포함해 숲에서 지내는 방법을 모두 터득했다.

무뇨즈는 20살이 되자 사냥을 그만뒀는데 바로 경비원으로 일하던 삼촌 한 명이 해준 충고 때문이었다. 삼촌은 무뇨즈에게 그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사냥하는 대신 관광객들에게 동물을 보여주는 일을 하면 형편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몸에 밴 습관을 떨쳐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삼촌이 나를 경비초소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 가까이에 야생 닭과 페커리가 있었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녀석들을 잡을 막대기나 돌멩이를 찾으려 했어요. 그 습관이 내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던 것이죠. 이런 생각이 사라지기까지 2년이 걸렸어요.” 무뇨즈가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무뇨즈와 함께 해변을 따라 코르코바도 국립공원 남쪽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날 우리는 공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작은 망원경이 달린 삼각대를 소총처럼 어깨에 멘 무뇨즈는 거미원숭이들을 가까이 유인하거나 머리깃카라카라, 흰목꼬리감기원숭이 가족, 골포만의 작은 독개구리, 할로윈게를 뜯어 먹는 흰코코아티 등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 갑자기 멈춰서곤 했다.

이튿날 무뇨즈가 나를 도스브라조스 마을로 데려갔다. 이 마을에는 공원 동쪽으로 들어가는 전용 오솔길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길을 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전직 금광 광부들이었다. 무뇨즈는 일부 주민들을 안내인으로 일할 수 있게 교육시켰다. 한편 다른 주민들은 관광객들에게 숙박시설과 식사, 요리 수업을 제공한다. 이 오솔길은 공원의 공식 산책로와 연결되지는 않지만 접근하기가 더 쉬울 뿐 아니라 반도에서 들새를 관찰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손에 넣은 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요. 이제 그들은 새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죠.” 무뇨즈가 말했다.
 
오사반도 동부에서 골포만 바다 횡단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대회는 더 많은 방문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관광 비수기인 늦여름에 개최됐다. 참가자들은 여름이면 남태평양에서 이 만의 보호수역으로 새끼를 낳으러 오는 혹등고래들과 함께 골포만을 헤엄치게 된다.
이듬해 봄, 도스브라조스나 란초쿠에마도에는 요리를 접대할 관광객이 없었고 안내인들에게는 일거리가 끊겼다. 그리고 나무를 가꾸거나 태평양 해변에서 갓 부화한 바다거북 새끼에게 접근하려는 포식동물들을 쫓아내기 위해 오사 컨서베이션에 자원봉사를 지원한 이들도 없었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코로나19의 위협에 외국인 관광을 전면 금지하며 적극적인 대응책을 펼쳤다. 미국 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26만 4808명에 달했던 지난 11월 말 무렵까지 코스타리카에서는 169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경제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관광 산업이 붕괴되면서 코스타리카의 국립공원 체계를 지원하던 자금이 끊기자 당국은 지난해 3월 코르코바도 국립공원을 폐쇄하고 경비원들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몇 주 동안은 별일 없이 잠잠한 날들이 이어졌다. 이윽고 오사반도의 관광 안내인들이 공유하는 소셜 미디어에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관광객과 단속반이 없는 틈을 타 누군가가 공원 안에서 사냥 관광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냥꾼 두 명이 식량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오락을 목적으로 흰입페커리 아홉 마리를 죽인 일이 벌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관광 안내인으로 일하다가 코로나19 사태 이후로는 오사반도에서 환경보호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디오니시오 파니아구아 카스트로에게 연락을 취했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괴로움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재미 삼아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죽이다니!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어요.” 그가 말했다.

안내인들의 신고에 따라 당국은 경찰을 보내 사냥꾼 몇 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고조되는 위기에 대처하기에는 공원이 너무 넓은 데 반해 단속은 매우 미미하고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문제는 사냥꾼들만이 아니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실업률과 전 세계 금값이 급증하자 광부들이 지난 수십 년간 볼 수 없던 규모로 다시 공원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혼란을 틈타 마약 밀매업자와 벌목꾼도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방어 수단이 하나 더 있었으니 오사반도의 주민들이었다. 당시 코스타리카의 환경부 장관이었던 카를로스 마누엘 로드리게스는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간부단 개념을 부활시켰다. 경비원을 자진하고 나선 52명에게 감시 기술을 전수한 후 이들을 공원 주변에 배치해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 간부단은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휴대전화와 사진기, 지역사회 연락망을 갖추고 있어 불법 행위를 목격했을 때 신속히 단속반에 신고할 수 있다. 문제의 상당수는 오사반도 외부에서 조직된 일당들로부터 일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관광업으로 유지되던 경제가 무너지면서 일부 지역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낡은 냄비와 삽을 들고 공원에서 불법으로 금을 캐는 광부 무리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밥벌이 수단을 찾아야만 하는데 그중 하나가 금을 캐는 것이죠.” 무뇨즈는 나와 통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자리를 잃은 안내인 중 한 사람으로서 금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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