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보르시벨트
글 : 니나 스트롤릭 사진 : 마리사 샤인펠드 외 2명
미국 뉴욕주에 있는 캐츠킬스에서 보내는 행복한 여름휴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유대인 가족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캐츠킬스의 전성기가 다시 찾아온 것일까?
“이곳을 방문하니 어린 시절이 생각나세요?” 나는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가 1950년대에 뉴욕주 캐츠킬산맥에서 보냈던 여름날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함께한 이번 여행에서 이미 수차례 같은 질문을 던진 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엄마의 대답은 줄곧 부정적이었다.지금 우리는 엘런빌에 있는 코헨 베이커리에서 호밀빵과 초콜릿이 든 페이스트리를 사고 있다. 이 빵집은 1920년경에 생겼다. “계산해주는 사람이 이디시어를 사용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엄마는 어깨를 으쓱한다.
100여 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수가 산재한 캐츠킬스 지역은 뉴욕시 북쪽의 카운티 네 곳에 걸쳐 있다. 한때 고급 호텔과 번화한 작은 마을이 즐비했던 이곳은 여름철 피서를 온 유대인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2011년 내가 뉴욕시로 이주할 무렵에는 ‘유대인들의 알프스산맥’이라는 이곳의 명성은 이미 퇴색한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캐츠킬스에 있는 스칸디나비아풍 오두막과 모닥불을 찍은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1950년대 여름의 영광이 되살아난 것일까? 나는 엄마를 모시고 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1900년대 초 뉴욕시 부근의 고급 호텔과 해변들에서 유대인과 다른 소수 민족의 출입이 금지됐을 때 캐츠킬스는 그들에게 도피처가 돼줬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가족들은 비좁은 아파트를 떠나 이 산맥을 찾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출신의 난민인 내 조부모님도 브롱크스로 이주해 이 새로운 전통을 따르기 시작했다.
봄 학기가 끝나면 그들은 침구와 식기류, 옷을 차에 한가득 싣고 떠나 노동절까지 캐츠킬스에서 지냈다. 이 지역에 있는 ‘방갈로 마을’에서 여름을 보낸다는 것은 작은 오두막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수영장이나 호수 또는 클럽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였다. 브롱크스에서 양말 상점을 운영했던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캐츠킬스에 가곤 했다. 엄마는 개울에서 헤엄치던 올챙이들과 가장 무도회, 금속제 반사판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수영장 옆에서 선탠을 즐기던 여자들이 기억난다고 했다.
한편 캐츠킬스에 있는 대형 호텔들에서는 오락거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밤이면 코미디언들이 잘 차려입은 관중들 앞에서 입담을 뽐내곤 했다. ‘보르시벨트’라고 알려진 이 지역의 호텔 단지에서 탄생한 유머는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고유의 특징을 갖게 됐다. “신사 숙녀 여러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내 여자친구를 예로 들어 볼게요. 나는 내 여자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이고요. 내 아내 입장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 해외 여행이 쉬워지고 유대인에 대한 호텔 출입 금지 조치가 사라지면서 관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히피와 로큰롤의 시대가 오면서 캐츠킬스에서 보내는 통속적이지만 사치스러운 여름휴가는 매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문을 닫았던 상점들이 아이스크림 가게나 타코 전문점으로 새 단장을 했다. 옛날식 공동체 생활에 매력을 느낀 도시의 젊은 가족들이 얼마 남지 않은 방갈로 마을의 집들을 앞다퉈 사들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 1960년대의 모텔을 개조해 만든 ‘스크라이브너 캐츠킬 로지’ 같은 장소들에서 이런 부흥의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 거대한 통 모양의 사우나와 색색의 책꽂이를 갖추고 있으며 객실마다 디저트를 봉지에 넣어 제공해주는 등 스크라이브너 산장은 2016년에 문을 연 이후 인스타그램 시대의 캐츠킬스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숙소로 자리매김했다.
캐츠킬스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면서 나는 현재의 모습에서 엄마가 어린 시절에 근심과 걱정 없이 보낸 여름날들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머물렀던 방갈로 마을 ‘미슈킨 코티지’가 불빌이라는 동네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동네는 엄마가 남자 형제들과 사탕을 사곤 했던 잡화점 인근의 철길을 따라 있었다. 우리는 차를 몰고 시골 도로를 쭉 따라가다가 작은 교차로에서 멈춰 섰다. 엄마가 알아본 한 건물에서 만난 점원은 한때 기차가 이 근처를 지나다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슈킨 코티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운영 중인 방갈로 마을 중 남아 있는 곳 대부분은 여름 내내 임대하는 것이 아니면 방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차선책으로 ‘글렌 와일드’를 택했다. 이곳은 브루클린 출신의 디자이너 두 명의 손을 거쳐 에어비앤비 숙소로 재탄생했다. 땅은 푸릇푸릇하고 야외용 의자와 공용 화로, 기다란 피크닉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날 밤 당시 글렌 와일드의 공동 소유주였던 조시 팔리가 2014년에 이곳을 둘러봤던 일에 대해 설명한다. “좀비로 인해 종말을 맞이한 세상 같았어요.” 18개의 방갈로 대부분이 수십 년간 방치된 상태였다. 지금은 그중 여덟 개가 개조됐다. 팔리는 비닐 바닥재를 벗기고 찬장에서 오래된 식기들을 비우는 동안 이웃 주민들에게 캐츠킬스의 역사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새 단장을 하면서도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한 글렌 와일드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무질서하고도 자유로운 분위기와 해마다 같은 가족들을 만나면서 느낀 위안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캐츠킬스에서 여름을 보내지 않게 된 것은 할머니가 암 진단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할머니는 엄마가 11살 때 세상을 떠났고 캐츠킬스에서 여름을 보내는 전통도 그렇게 끝나버렸다. 할아버지가 주중에 가게를 지키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1970년대에는 보르시벨트 자체가 사양길에 들어섰다. 유명한 리조트들은 금세 버려졌다. 그로스싱어 리조트의 대연회장에는 오래된 메뉴판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유리로 둘러싸인 실내 수영장은 그래피티로 뒤덮였다. 원래 이곳은 전용 활주로를 갖추고 있었으며 영화 <더티 댄싱>에 영감을 준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마리사 샤인펠드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캐츠킬스의 명소들이 쇠퇴해가는 모습을 촬영했다. 어린 시절에 샤인펠드는 카드 게임을 하러 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화려한 콩코드 리조트 호텔을 찾곤 했는데 1980년대였던 당시는 이미 호텔의 전성기가 지난 후였다.
현재 잘 꾸며진 캐츠킬스 전역의 호텔과 임대용 숙소의 탁자에는 샤인펠드의 저서 <보르시벨트>가 곳곳에 비치돼 있다. 그녀는 이 책에 실린 사진들 중 오랫동안 방치돼 금이 간 수영장에서 콘크리트 틈 사이를 뚫고 나온 초록색 양치식물을 찍은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 “오래된 것에서 새것이 자라나고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내가 캐츠킬스의 부활을 바라보는 관점이죠.” 그녀는 말한다.
로즈마린스 코티지는 뉴욕시 타임스퀘어에서 북쪽으로 불과 80km밖에 안 떨어져 있는 캐츠킬스의 작은 언덕에 있다. 이 지역의 오래된 방갈로 마을들은 대부분 여름 캠프 시설로 바뀌었지만 로즈마린스 코티지는 나무 판자로 만든 방갈로부터 일요일마다 열리는 소프트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옛 캐츠킬스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3대 소유주인 스콧 로즈마린이 나와 엄마를 골프 카트에 태우고 풀이 자란 길을 따라 달린다. 스콧의 할아버지는 1941년에 로즈마린스 코티지를 매입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다른 방갈로들이 문을 닫자 갈 곳을 잃은 고객들까지 받아들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방문객들의 연령대가 높아졌고 경기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다. 스콧에 따르면 2020년 여름에는 옛 시절을 보는 듯했다. 예약이 꽉 찼고 눈을 가린 채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호수에 메아리쳤다.
약 50ha에 달하는 이곳 부지에는 총 96채의 방갈로가 있으며 수영장과 오락실이 하나씩 있다. 오락실에서 90살 된 스콧의 모친이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콧이 카지노의 문을 연다. 이곳은 수십 년간 토요일 밤마다 축제가 벌어졌던 장소다. 스콧은 큰 변동 사항이 한 가지 있다고 말한다. 로즈마린스 코티지에서는 이제 “가수와 코미디언을 초대하지 않는다.” 대신 요즘에는 푸드트럭을 부르고 콘서트를 연다.
무대를 본 엄마의 입이 쩍 벌어진다. 화이트산맥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수작업으로 그린 그림이 배경으로 걸려 있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무대 장비들과 의자들이 입구에 가득 쌓여 있다. “이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이 생각나세요?” 나는 엄마에게 묻는다.
“기억 속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구나.” 엄마가 답한다.
“어릴 때 방갈로 마을을 찾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는 데 동의할 거예요.” 스콧은 말한다.
그의 말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래요. 무척 자유로운 시절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