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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통하는 길을 되살리다

글 : 니나 스트롤릭 사진 : 안드레아 프라제타

아피아 가도는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을 상징했다. 현재 이탈리아 정부는 역사를 관통하는 순례길을 조성하기를 바라며 이 고대의 도로를 복원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 외곽에 있는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는 유리 바닥을 통해 몇 미터 아래로 고대 로마 도로의 일부였던 납작한 회색 포석들과 2000년 된 배수로를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골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유럽 최초의 주요 도로였던 아피아 가도의 흔적이다. BC 31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아피아 가도는 로마 시내를 구불구불 빠져나간 뒤 이탈리아 남부를 가로질러 동쪽에 있는 항구 도시 브린디시에 이른다. 이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속담이 탄생하는 데 일조했으며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레지나 비아룸,’ 즉 길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 유산은 대부분 방치돼 1000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포석과 함께 파묻혀버렸다.

현재 이탈리아 정부는 아피아 가도(비아 아피아)를 번잡한 로마에서 출발해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국토에서 발꿈치 부분에 위치한 고즈넉한 항구 도시 브린디시까지 이어지는 순례길로 바꾸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탈리아 국토를 약 580km에 걸쳐 종단하는 아피아 가도는 숲길과 도심 광장, 도로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모든 구간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거나 쾌적한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들은 이를 통해 사람들이 대체로 방문하지 않는 이탈리아의 명소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탐방객이 오기 전에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피아 가도를 발굴하는 것이다. 일부 구간의 경우 위치부터 파악해야 한다. 어느 가을날 아침 내가 유명한 햄버거 브랜드의 매장에서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로마 내의 아피아 가도는 18km에 달하는 구간이 고고학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의 마지막 구간은 수풀이 우거진 언덕길이다. 이 지점 이후로 아피아 가도는 80km에 걸쳐 아스팔트 아래로 거의 모습을 감춘다.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그 마지막 자취를 볼 수 있는 장소가 맥도날드 매장 아래인 것이다.

이곳에는 최근에 발굴된 후 보존된 희귀한 구간 중 하나로 아피아 가도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샛길이 있다. 매장 관리자에게 고대의 포석들에 대해 묻자 그는 구석 탁자에 앉은 한 여성을 소리쳐 부른다. 그녀는 2014년에 이 길을 발굴한 고고학자 파멜라 세리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세리노는 앞으로의 작업을 관련자들과 논의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참이었다.

우리는 매장을 나와 계단을 따라 고대의 포석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발굴 작업은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아피아 가도를 보고 싶다고 굳이 매장에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세리노는 설명한다. 배수로에 유골 세 구가 놓여 있다. 그녀가 이곳에서 처음 발굴한 유골을 본뜬 복제품들이다.

매장 공사 현장에서 아피아 가도의 일부가 처음 발견됐을 때 주민들은 이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고대 로마의 유산을 사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세리노에 따르면 고고학 유적은 보존을 목적으로 다시 매립되는 경우가 많다. 유적을 관리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피아 가도를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구간이 발견된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시대에 아피아 가도는 물자와 병사, 가축, 사상을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지금도 목동들은 현재 아피아 안티카 고고학 공원으로 지정된 로마 내의 경로를 따라 가축들에게 풀을 먹인다.
I. 경로

비아 아피아는 도시와 마을, 산, 농경지와 교차하며 이탈리아의 네 개 지역을 지나간다. 대부분의 구간은 도로가 포장되면서 교통량이 많은 스트라다 스타탈레 7번 도로 아래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지만 마을 광장에 있는 칵테일바 옆쪽이나 잡초가 무성한 밭을 뒤덮은 두꺼운 방수천 아래 등 원형 그대로의 포석이 드러나 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구상한 대로 군사 정벌을 위한 수단이었다. 길을 1.6km씩 새로 깔 때마다 노예와 인부들이 약 4만 5300m³에 달하는 양의 흙과 돌을 파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도로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일로 그 중요성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력을 잃고 도로가 완공되기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바다를 건너 동진하며 해외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아피아 가도는 이탈리아를 거의 일직선으로 관통하면서 로마군을 실어 날랐다. 이 도로는 로마에서 뻗어 나간 29개의 주요 도로 중 최초로 건설된 것이었다.

BC 35년경 시인 호라티우스를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가객들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가는 여정에 대해 기술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 토목공학의 위업으로 여겨졌던 아피아 가도의 명성은 AD 395년 로마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퇴색했고 도로도 점차 쓰이지 않게 됐다. 영국 출신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1846년에 쓴 책에서 아피아 가도를 ‘무너져 폐허로 남은 무덤과 사원’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5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 파올로 루미즈가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기사를 연재할 목적으로 아피아 가도를 걷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문제는 정확한 경로가 표시된 현대식 지도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거의 40년간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닌 유명한 도보 여행가 리카르도 카르노발리니(64)에게 연락을 취했다. 카르노발리니는 두 달간 군사용 지도와 양치기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해온 소로, 위성 사진을 조합해 아피아 가도의 경로를 도면에 옮겼다. 그 후 그는 이 경로를 위성항법장치(GPS)에 업로드한 다음 루미즈와 함께 걸어갔다.

루미즈의 여정은 문화유산부의 관심을 끌었다. 2015년 이탈리아 정부는 아피아 가도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수백 년에 걸친 난개발로 많은 고고학 문화유산이 이미 개인의 손에 넘어갔으며 고택은 무분별하게 개축됐다. 보존 사업이 시작됐지만 방문객이 없다면 아피아 가도는 또다시 잊힐 수 있었다.

“걷는 것은 풍경을 바꾸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행동입니다.” 이후에 아피아 가도에서 만난 카르노발리니는 말했다. 그러나 찾기 힘든 경로와 부족한 숙박 시설 및 지지 기반 시설 등 수많은 장애물이 도보 여행자들을 가로막고 있다.

‘스튜디오 코스타’의 창업자 안젤로 코스타의 구상을 들어보자. 스튜디오 코스타는 아피아 가도를 도보 여행길로 바꾸는 용역을 수주한 건설업체 세 곳 중 하나다. 그의 제안은 역사적으로도 선례가 있다. 아피아 가도를 이용한 고대 로마인들은 16km마다 말을 바꿔 타는 역을, 32km마다 숙소를 볼 수 있었다. 코스타는 이를 발전시켜 각각 여섯 시간 정도 소요되는 도보 구간 29개를 조성하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

여행객들은 유명한 검투사 시합이 벌어졌던 경기장을 둘러보고 소박한 숙소에서 묵으며 지역 별미를 맛볼 것이다. 휴게소뿐 아니라 기존에 운영되던 숙박 시설과 신규 숙박 시설 그리고 관광지가 애플리케이션에 표시될 것이다. 이런 간소화 전략의 목적은 미흡한 구간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간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코스타를 비롯해 아피아 가도 개발 사업에 참여한 여러 관계자들이 물밑 경쟁의 조짐을 인정하고 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보통 30만 명의 도보 여행가들을 유치하고 있으며 연간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한다.

로마에서 브린디시까지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는 종교와는 무관하게 이탈리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여정을 제공한다.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건너간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교하면 “이곳의 자연 경관이 오히려 더 뛰어납니다. 역사는 200배 길고요. 게다가 마지막에는 바티칸에 이르게 되죠.” 코스타는 말한다.


II. 기점

나는 출발점에서부터 아피아 가도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곧 출발점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첫 번째 포석들은 교통이 혼잡한 로마 도심의 한 환상교차로 부근에 파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탈리아 문화유산부는 차량 운행을 통제하지 않고 포석들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작은 면적의 포장도로 일부를 깊이 파내려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득은 없다.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를 내려가면 보존 상태가 가장 우수하고 걷기 편한 구간인 아피아 안티카 고고학 공원이 있다. 이 길은 로마 중심부에서 시 외곽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며 길 양편으로 400여 곳의 고고학 유적이 산재해 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로마 시대의 저택과 50만 구의 시신이 안치된 초기 기독교 시대의 지하 묘지, 노예와 고대 로마의 상류층 소녀들이 나란히 매장된 묘역 등이다.

하지만 로마를 찾는 보통의 관광객은 정신없는 관광 일정에 휩쓸려 겨우 며칠을 이곳에 머문 후 피렌체나 베니스로 떠난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한 해에 10만 명이 이 고고학 공원을 방문했다. 반면 북쪽으로 3km 떨어져 있는 콜로세움에는 700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새로 부임한 공원 관리소장은 공연과 축제, 문화유산의 날 등으로 구성된 매력적인 행사 일정을 추진했다. 어느 따사로운 가을날, 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모들이 무너진 로마 경기장 주변의 잔디밭에서 소풍을 즐기는 동안 아이들은 장난감 검투사 칼을 휘두르며 신나게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원은 로마의 여느 고대 관광 명소와는 다르게 평화롭다. 로마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포석 주변의 고고학 유적은 드문드문해지다가 결국에는 수풀이 무성한 들판 한가운데 기둥이나 석상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게 된다. 수관이 편평하고 잎이 무성한 우산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군데군데 사적 안내 표지와 급수대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맥도날드 매장에 이르면 아피아 가도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III. 시간을 거슬러 걷다

로마를 빠져나온 이후의 경로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2015년에 아피아 가도를 지도로 제작한 도보 여행가 리카르도 카르노발리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는 소도시 베네벤토의 광장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만났다. 카르노발리니는 지퍼로 무릎 아랫부분을 분리할 수 있는 바지와 플리스 재킷 그리고 벌써 725km를 여행한 새 등산화를 착용하고 있다.

2015년 카르노발리니와 작가 파올로 루미즈가 처음 아피아 가도를 도보로 여행했을 당시 그들이 최종적으로 이동한 거리는 본래의 경로보다 약 80km 더 길었다. 현대화로 과거의 도로가 상당 부분 개발된 탓에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와 산업단지를 우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마에서 225km나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카르노발리니는 이 지역을 아피아 가도의 본래 경로를 두고 수많은 의견 불일치를 낳은 시작점으로 묘사한다. 그는 현대의 경로를 짜기 위해 각종 지도와 도로의 각도, 건축 자재 등을 분석해 가장 그럴 듯한 경로를 선정했다. 그럼에도 그의 GPS 장치에 표시된 분홍색과 파란색 선은 여전히 상충되는 의견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른 길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관광을 목적으로 이용되는 경로입니다. 이 여정은 그저 걷는 것이 다가 아니라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죠.” 종업원들이 식당 문을 닫을 채비를 하는 동안 그는 말한다.

다음 날 우리는 길에서 짐을 잔뜩 싣고 담배밭과 풍차가 늘어선 언덕 그리고 계획적으로 불을 놓은 밭을 가로질러 달리는 트랙터들을 지나친다. 카르노발리니는 개암을 까먹거나 길가에 늘어선 포도나무에서 와인용 포도를 따면서 느긋하게 걷는다.

아피아 가도는 그야말로 이 한적한 시골 마을들에 흡수된 상태였다. 도로를 구성하는 돌과 기둥이 농가의 벽과 문간에 박혀 있었다. 길고도 특색 없는 길 위에서 카르노발리니의 GPS에 표시된 붉은색 선만이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시였다.
 

IV. 꾸밈없는 관광

이탈리아 문화유산부는 아피아 가도를 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예산으로 2000만 유로(약 271억 원)를 책정했다. 하지만 경로를 따라 산재한 고고학 유적들을 답사해보니 더 많은 예산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2020년 한 해를 꼬박 들여 파소디미라벨라 마을에서 45m 길이의 아피아 가도를 발굴했다. 이 구간은 현재 대형 방수천으로 덮여 있다. 발굴 팀이 계속해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예산이 필요하다.

카르노발리니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가는 여정이 독특한 이유는 꾸밈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의를 준 바 있었다. “아피아 가도 체험은 극과 극을 오갑니다. ‘와, 아름답다’ 하고 감탄하며 돌아서기가 무섭게 ‘와, 저건 끔찍하네’라고 말하게 되죠.” 그는 말했다.

“이탈리아의 모든 장소가 그림엽서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니까요.” 그는 덧붙였다.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에서 약 65km 떨어진 항구 도시 타란토가 가까워오자 이러한 현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은 카르노발리니와 루미즈가 도보로 여행하는 동안 유일하게 택시를 불러야 했던 곳이다. 내 앞에 16km² 면적의 산업 시설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어느 이탈리아 언론인이 내게 경고했던 것처럼 오염물을 토해내는 이 유럽 최대 규모의 제철소 때문에 타란토는 ‘이탈리아의 구덩이’로 전락해버렸다.

아피아 가도는 이 공장을 끼고 타란토의 구시가지가 있는 섬으로 접어든다. 그곳에 이르면 시간을 6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작은 가게 앞에서 노인들이 성화를 그려 몇 안 되는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고깃배들은 부둣가 산책로를 따라 난 공간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간혹 돌고래와 고래들이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굽이진 골목길은 대리석 장식이 가득한 성당으로 이어진다. 일순간 타란토는 아피아 가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된다. 하지만 이처럼 신기루 같은 옛 이탈리아의 정경 위로 검은 연기가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다.

타란토는 스파르타인들이 그리스 밖에 세운 유일한 도시로 지금도 물가를 따라 그리스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바로 이곳에서 나는 공장 폐쇄를 요구하는 활동가 연합에 소속된 마시모 카스텔라나를 만난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철가루가 마을로 날아드는 날이면 주민들은 창문을 굳게 닫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여러 연구를 통해 이 도시의 암 발병률이 특히 아이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전국의 평균치보다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카스텔라나는 타란토가 산업이 아닌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년에 걸친 항의에도 불구하고 공장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다.

카스텔라나 같은 이들이 아피아 가도 복원 사업에 걸고 있는 희망들 중에는 역사를 이용해 관광업을 되살려 이탈리아 남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이탈리아 남부는 오랫동안 범죄의 온상이라는 선입견으로 점철돼 있었다. 나는 타란토를 떠나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인 브린디시로 향하는 도중 한때 읍성이었던 메사그네에 들러 현지 영화진흥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시모네타 델로모나코를 만났다. 그녀가 삶의 좌우명을 내게 귀띔해준다. “문화는 아무리 소비해도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연료입니다.”

델로모나코가 어렸을 때 메사그네는 이탈리아 4대 마피아 가문인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최근에 개봉한 제임스 본드 영화를 비롯해 여러 할리우드 영화의 촬영지라는 이미지가 과거의 오명을 대체하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길이 끝나는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델로모나코는 말한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 시대에 ‘데쿠마누스’라고 알려진 주요 도로가 되기 전에는 브린디시로 통하는 관문에 도달했거나 관문을 통과했을 것이다. 정교하게 세공된 기둥 한 쌍이 브린디시 항에 세워졌는데 이 기둥들은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현재는 기둥이 하나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수백 년 전 이웃 도시에 기증됐다.
V. 길이 끝나는 곳

“브린디시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가장 융성했습니다. 그들은 항구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브린디시에서 동쪽으로 뻗어갈 수 있었죠.” 한 현지 안내인이 브린디시의 산책로에 모인 소규모의 방문객들에게 해설을 하고 있다. 10월의 어느 화창한 오후에 연례 행사인 ‘비아 아피아의 날’을 맞아 관광객들이 종착지를 둘러보고 있다. BC 266년경에 로마군은 이곳으로 진군해 메사피아 문명을 정복하고 아피아 가도를 완성했다.

안내인이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를 표시하는 유명한 기둥들을 향해 높은 계단을 오르고 있다. 관광객들은 우뚝 솟은 기둥 하나와 또 다른 기둥의 기단 주변에 모여 사진을 찍는다. 남아 있는 기단의 윗부분은 수백 년 전 이웃 도시에 기증됐다. “보통 이 기둥들을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 사실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아요.” 그녀는 말한다.

잠깐, 아피아 가도의 기점은 확실치 않았지만 종착지만큼은 언제나 분명했다. 즉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브린디시에 서 있는 한 쌍의 기둥이었다. 하지만 대리석을 분석한 결과 이 기둥들은 아피아 가도를 완성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야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아피아 가도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한 고고학자는 종착지를 찾는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아피아 가도는 거리에서 도로로, 그리고 고속도로로 카멜레온처럼 형태를 바꾼다는 점에서 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체계에 가깝다. “우리는 환상을 쫓고 있습니다.” 그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브린디시가 아피아 가도를 발판으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했으며 로마군이 이곳을 기점으로 동진해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같은 도시들로 제국을 확장했다는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로마제국은 세 대륙에 걸쳐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했다.

브린디시는 성지 순례자들의 집결지로 자리를 잡았으며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출항하는 배를 몇 주씩 기다렸다. 오늘날에는 브린디시로 통하는 다양한 도보 여행길을 따라 해마다 수백 명의 여행객이 이 도시를 찾는다.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로서 브린디시의 옛 명성을 되찾는 것이 로지 바레타의 오랜 염원이다. 바레타는 ‘브린디시와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순례자들의 방문을 주선하는 단체를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으며 그녀의 가족은 대형 예인선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공학과 독창성의 결정체인 아피아 가도를 그 누구도 돌보지 않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시간을 낭비한 셈이죠.” 그녀는 브린디시가 아피아 가도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행자들로 다시 한 번 북적이는 날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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